예수님을 믿었고 그 길을 예비히고 알아보았던 세례요한이
옥이 갇혔을 때 무엇인가 예수님께 섭섭하고 의심하여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이를 기다려야 됩니까?" 하고
의심하고 시험 받아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11:6]
누구든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도다.[공동번역]
왜 그렇습니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만 가르침대로 해 볼 수가 있고
가르침대로 해 본 사람만이 진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하지요
"누가 참 선생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이 물음에마이다 슈이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내 처지에서 어떤 사람이 참 선생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예컨대, 내가 A, B, C 세 후보 중에서 참 선생을 가려 뽑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을 말한다면 나는 아직 무엇이 참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아직 무엇이 참인지도 모르는 내가,
어떤 선생이 참 선생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가 객관적 논리로 여러 후보를 비교, 평가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참 선생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오류다."
여러 경쟁자들 가운데서 승자를 가려내는 일이라면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큰 사람인 선생을 평가하는 데
학생이 자신의 변덕스런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생에 의해서 깨어져야 할 변덕스런 기준을 가지고
누가 참 선생인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이다 슈이치는 이점이 '신란'의 경우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말한다.
"신란의 눈이 욕망과 정열로 온통 흐려져 있기에
그의 눈에 비친 호오넨의 상은 흐릿하고 몽롱하다.
신란이 색안경을 쓰고 있기에 그가 보고 있는 호오넨은 같은
색깔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누가 참 선생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일까?
마이다는 한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학생이 선생과 하나 되는 것, 또는 믿음(신심)이 그것이다.
여기 '하나됨'이란 학생의 자아가 선생에 의하여 철저하게 부정되고
삼키워져 마침내 그와 하나로 되는 것을, 그리하여 더 이상
그가 참 선생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말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한다.
학생의 판단이 아니라 이와 같은 '하나된'만이,
그의 선생이 그에게 참 선생임을 입증할 수 있다.
마이다는 죽기 두달쯤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아케가라수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를 떠나서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가 '진리'이다. 그가 석가모니 자신이다.
만일 이 생각이 잘못 된 것이라면 나의 일생도 실패작이며 지옥일지라도
그러나, 그래도 좋다. 나는 만족하면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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