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의 탄생은 우연한 실수? cover 구글혁명 10의 100승을 뜻하는 ‘구골’을 잘못 표기… 창업자 페이지와 브린, 기숙사 방에서 부품 주워와 개발 | |||||||
1997년 9월 미국 스탠퍼드대학 박사과정생이었던 래리 페이지는 친구인 루카스 페레이라에게 “오타를 냈다”며 면박을 주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의 역사를 바꾼 구글의 이름은 이렇게 우연한 실수로 생겨났다.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당시 24살)와 세르게이 브린은 친구들과 모여 새로운 인터넷 검색 서비스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모임 장소는 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스탠퍼드대학에 기증한 ‘게이츠 빌딩’이었다.
MS가 기증한 건물에서 태어난 구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MS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으로 성장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골’을 회사 이름으로 쓰고 싶어했다. 구골은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케스너가 만든 말로, 10의 100승, 즉 무한히 큰 숫자를 뜻한다. 두 사람은 “우리가 개발한 검색엔진으로 인터넷상의 모든 웹페이지를 검색하겠다”며 그 의지를 회사 이름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구골닷컴은 이미 다른 사람이 인터넷 주소로 등록한 상태였다. 페이지와 브린은 울며 겨자먹기로 대신 구글닷컴을 등록했다.
래리 페이지는 부모가 모두 컴퓨터 전문가였다. 아버지 칼 페이지는 미시간주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이고, 어머니 글로리아도 컴퓨터 교사다. 페이지는 발명가를 꿈꿨다.
12살 때 읽은 위대한 발명가 니콜라 테슬러의 전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856년 출생한 테슬러는 세르비아계 이민자로 당대 최고의 발명가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탓에 그에 걸맞은 부와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현재 모든 가정에서 쓰이고 있는 교류 전기(AC) 시스템과 리모컨 등을 최초로 발명했다. 그런데 그의 경쟁자였던 토머스 에디슨이 이를 폄하하고 보급을 방해했다. 테슬러는 교류 전기의 보급을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과감히 포기했다. 테슬러가 특허권을 유지했다면 교류 전기의 보급은 지연됐겠지만 최소한 그의 자손은 엄청난 부자가 됐을 것이다.
불운했던 테슬러와 달리 페이지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발명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다. 페이지는 스탠퍼드대학에서 브린을 만났다.
브린은 모스크바 태생의 유대인으로 5살 때 부모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브린의 아버지는 수학자로 현재 메릴랜드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브린은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고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둘은 처음에는 상대에 대해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티격태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브린은 페이지가 검색엔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가장 어려운 수학적 난제를 해결해줬다. 일을 함께 하면서 두 사람은 단짝이 됐다.
구글의 전신인 백럽(BackRub)은 래리 페이지가 자신의 검색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로봇 프로그램이었다. 페이지는 로봇이 모아온 웹데이터를 저장할 PC서버들을 자신의 기숙사 방안에 쌓기 시작했다. 새 검색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컴퓨터 자원이 필요했다.
페이지와 브린에게는 돈이 없었다. 이들은 학교 실험실에 방치돼 있던 하드디스크 등 PC 부품을 구걸하다시피 얻어와 기숙사 방안에서 하나씩 조립했다. 페이지의 기숙사 방은 늘어난 컴퓨터와 각종 장비로 꽉 차 누울 공간조차 없었다. 대신 브린의 기숙사 방이 사무실 겸 개발실로 쓰였다.
구글의 인터넷 검색 기법은 논문의 질(質)을 평가하는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학계에서 어떤 논문의 가치를 평가하는 대표적인 척도는 ‘다른 논문이 특정 논문을 얼마나 많이 인용했는가’다.
페이지와 브린은 이 기준을 인터넷 웹문서에 적용했다. 같은 키워드가 포함된 웹문서가 여러 개 있다면 이 중 다른 웹페이지가 가장 많이 링크(link)한 웹문서가 가장 쓸모있고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구글은 다른 웹페이지로부터 링크가 많이 걸린 순서에 따라 검색 결과를 표시했다. 기존의 검색 엔진은 어떤 검색어가 포함돼 있는가만 조사했기 때문에 쓸모없는 웹사이트 수천 개가 나열돼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이지와 브린이 처음부터 회사를 차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검색 엔진을 기존 포털업체에 팔려고 했다. 희망 가격은 16억원. 그러나 야후, 인포시크, 익사이트 등 어떤 포털업체도 이 돈을 주고 구글을 사려하지 않았다. 구글의 현재 가치는 120조원이 넘는다.
페이지와 브린은 고민 끝에 개인 벤처투자자들로부터 100만달러를 투자받아 1998년 9월 구글을 창업했다. 구글의 첫 사무실은 페이지의 여자친구 집 차고였다. 구글은 창업 2년 만에 하루 1800만건의 검색을 하는 미국 최대 검색 사이트로 급성장했다.
구글은 다른 포털과 웹사이트에 검색 엔진을 임대해주는 사업도 벌였다. 2000년 5월부터는 야후에 검색 엔진을 납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휴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구글이 급성장하면서 야후의 지위를 위협하자 야후는 검색엔진을 자체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구글은 2000년부터 특정 검색어와 연계된 광고를 파는 ‘애드워즈’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검색광고는 인터넷 광고업체 오버추어가 선점한 아이디어였다. 오버추어는 구글에 대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분쟁은 몇 년간 지속되다 오버추어를 인수한 야후가 구글로부터 30억달러 상당의 주식(270만주)을 받는 조건으로 마무리됐다.
2004년 4월 구글은 주식을 나스닥에 상장할 계획을 발표했다. 구글의 주식 상장은 독특한 공모 방식으로 화제를 일으켰다. 월가의 전통적인 상장 절차를 거부하고 온라인 경매로 주식을 팔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구글은 투자자가 구입할 수량과 가격을 적어내는 방식으로 주식을 공모했는데, 이는 투자은행을 통해 주식을 배정하는 기존 관행을 깬 것이었다.
페이지와 브린은 주식 공개를 앞두고 플레이보이지(誌)와 인터뷰를 가져 경솔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주당 108~135달러로 설정된 최초 공모가가 너무 높다는 비판론이 대두됐다.
구글은 우여곡절 끝에 2004년 9월 19일 나스닥에 주식을 상장했다. 공모가는 85~95달러로 낮췄다. 구글 주식은 이날 100달러에 첫 거래를 시작했다. 거래량은 2220만주. 성공적인 데뷔였다.
구글의 주식 상장은 ‘구글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나스닥 시장을 침체의 늪에서 끌어올렸다. 구글의 주가는 2005년 11월 18일 400달러를 돌파했고, 나스닥 지수도 4년반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구글에 투자한 주주와 스톡옵션을 받은 사원은 백만장자가 됐다.
구글의 거침없는 도전과 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민구 주간조선 기자(roadrunner@chosun.com) ※ 이 기사 작성에는 이정은 인턴기자(caroline84@empal.com)가 참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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