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원망스런 마음으로 마구 퍼부어댄 편지요, 혼란과 비틀린 심사와 비난으로
가득한 편지였다. 또한 그것은 한 무더기의 분노어린 질문들이었다.
왜 내 인생은 순탄하게 굴러가지 않는 겁니까? 잘 굴러가게 하려면 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행복하고 즐거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겁니까?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만져보는 일 같은 건 내 평생 한번도 없을
거란 말입니까?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힘주어 한 질문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늘 이렇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너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받기를 참으로 원하느냐, 아니면
그냥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나는 놀라서 움찔했다...... 잠시 후 내 마음 속에 한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도 글로 적었다.
양쪽 다입니다. 나는 분명 푸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해답
이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꼭(Sure as hell) 듣고 싶습니다!
너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라고 하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살아서 꼭(Sure as Heaven)"이라고 하는게 더 멋지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 받아쓰기는 삼년간 계속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종이에 적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질문
을 완전히 다 적고 나서 나 자신의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전에는 절대 내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받아 적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대답이 나오는
바람에, 그걸 쫓아가려고 마구 휘갈겨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란스러워지거나, 그 말들이 어딘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놓칠 때면, 나는 펜을 놓고 대화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영감 - 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그 상태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은 이것뿐이다 - 을 느꼈을 때,
비로소 노란 종이철 앞으로 돌아가 받아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이런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처음엔 그걸 믿지
않았고, 그 다음엔 나 자신에게 퍽 의미있는 대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는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을 만나는 당신들
모두를 위한 메시지다. 내 의문은 곧 당신들의 의문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이므로, 나는 당신
들이 가능하면 한시바삐 이 대화에 뛰어들었으면 한다. 당신들을 여기로 데려온
건 바로 당신들의 인생체험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당신들 저마다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지금 이 대화에 참여
하지도 않았으리라.
자, 이제 내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한가지 의문, 즉 신은 누구
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내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받은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언제나 말한다. 문제는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말을 귀담아 듣는가이다.
의아해진 나는 그 문제를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신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말한다(talk)를 교류한다(Communicate)로 바꿔보자. 뒤의 것이 훨씬 낫고, 훨씬 충실하며 더 정확한 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즉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내게 얘기하려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말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 때문에 나는말만으로 교류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말로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자주 쓰는 교류 형식은 느낌이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다.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자신에게 참인지 알고자 한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느낌이란 건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
도 자주 있고, 그러나 네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것이야말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이다.
비결은 그런 느낌들에 다가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신에게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당장 원했던 것은 내 첫번째
질문에 대한 좀더 완벽하고 충실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자주 영상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운송수단을 쓰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낌도 생각도 체험도 모조리 실패할 때, 나는 말을 쓴다.
사실 말은 가장 비효율적인 전달자이다. 말은 너무나 빈번하게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를 낳곤 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은 그저 입 밖에 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과 생각과 체험을 드러내는 소리. 말은 상징이자 '기호'이고 '표식'이다.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다.
너희가 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 앎을 주는 것은 체험이다.
물론 너희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앎의 다른 도구들도 주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도구들을.
그런데 여기서 최고의 역설은 너희가 '신의 말'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험은 아주 하찮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 너희는 체험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있어서, 체험한 신이 말로 들은 신
과 다를 때 아무 생각없이 체험을 버리고 말을 간직한다.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너희가 어떤 것을 체험하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로서 알고 직관으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말이란 오직 너희가 아는 것을 상징할 수 있을
뿐이어서, 종종 너희의 앎을 어지럽힌다.
자, 이런 것들이 내 교류 도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그 자체로 교류 방법인
것은 아니다. 모든 느낌과 모든 생각과 모든 체험과 모든 말이 다 나한테서
나오는 건 아니기에.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빌어 많은 말을 해왔고, 많은 생각과 많은
느낌이 내가 직접 창조하지 않은 근거들의 뒷받침을 받아왔으며, 많은 체험이 런 근거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도전은 통찰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신에게서 나온 메시지와 다른 나온 자료의 차이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적용해보면 문제가 간단히 풀린다.
너희의 '가장 고귀한 생각', '가장 명확한 말', '가장 강렬한 느낌'은 항상
내 것이다. 그보다 덜한 모든 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다.
초심자조차도 가장 고귀하고 가장 명확하고 가장 강렬한 것을 확인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니, 이제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들도 주려 한다.
'가장 고귀한 생각'이란 예외없이 기쁨이 담겨 있는 생각이며, '가장 명확한
말'이란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며, '가장 강렬한 느낌'이란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 느낌이다.
기쁨과 진리와 사랑.
이 셋은 서로 뒤바뀔 수 있으며, 하나는 언제나 다른 것들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이 지침들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가 내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인지 결정하고 나면,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닌가뿐이다.
너희는 내 메시지를 대부분 그냥 흘려버린다.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훌륭해서 짜같이 보이지 않고, 또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어려워 따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많은 메시지들은 단순히 잘못 이해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다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메시지의 가장 강력한 전달자는 체험이다. 하지만 너희는 체험조차 무시
한다. 아니, 너희는 특히 이것을 무시한다.
만일 너희가 자신들의 체험에만 귀를 기울였더라도 너희 세상이 지금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체험을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겪게 되는 것은
체험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내 의지는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늦든 빠르든 결국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너희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를 지배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선택한 대로 할 수 있는 힘, 자유
의지를 주었고, 그것을 너희에게서 도로 빼앗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너희가 우주의 어느 구석에 있든 나는 몇천 몇만년을 두고 같은
메시지들을 너희에게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할 것이다. 너희가 내 메시지
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들을 가까이 두고 너희 자신의 것이라 말할
때까지, 나는 끝없이 보낼 것이다.
내 메시지들은 몇백만년에 걸쳐 몇천번의 순간에 몇백가지 형태로 올 것
이다. 너희가 진실로 귀 기울인다면 그것들을 놓칠리 없을 것이며, 한번
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교류는 가장 진지하게 시작될 것이다. 과거에 너희는 그저 나한테
이야기하거나 기도하거나 나를 중재하거나 내게 탄원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너희에게 답해줄 수 있다.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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