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관찰자

예수기도_필로칼리아

오래된미래관찰자 2005. 12. 10. 17:13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


전달수 신부


1. 영성생활이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은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서 하느님 중심적이며 역사 안에서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제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신비 안에 참여함으로써 성삼의 삶으로 인도되어 꽃피우고 열매맺는 삶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의 산상성훈의 가르침을 따라 완덕(完德)에 이르는 삶을 사는 데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주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아 살아가는 삶이다. 한 분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영성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양한 삶으로 드러난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보화의 결과로서(에페 3,8) 일찌기 성 토마스 아뀌나스가 진술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은 다양하여 교회의 미(美)와 완덕(完德)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사도 성 바울로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있는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며(참조.로마 12,3-8) 성령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선물들을 초대 교회의 활발한 체험을 근거로 인정하고 있다(참조. 1고린 12장). 이와 같이 은총의 작용은 개개인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므로 그런 삶은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개개인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므로 그런 삶은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성장 발전되어 왔다. 민족과 언어에 따라서 그리고 시대의 변천 과정에서 교회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각각 독특하고도 고유하게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독특한 영성을 꽃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었으니 이는 오로지 성령께서 베푸신 은총의 풍성한 결과이다.

복음 삼덕을 바탕으로 교회로부터 공인된 수도 공동체들도 그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관상(觀想)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회들이 있는가 하면 활동을 중시하여 각종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회들도 많다. 활동 중에서도 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수도회들이 있는가 하면 병원이나 양로원, 고아원과 같은 복지시설 등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삶을 수도 소명으로 하는 수도회들도 있다. 그리고 현장에서 일하는 평복 수도자들과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도 깊이 있는 영성생활을 하는 평신도들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다양한 생활 신분에 따라 각각 독특하고 고유한 영성이 있으며 각 영성은 하느님 안에서 우열의 차이가 없이 그 자체로 고귀하다. 개개인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고귀한 것처럼 다양한 영성 또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볼 수 있어 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에 꽃동산이 하나 있다고 하자. 여러 가지 색색의 꽃들로 덮혀 있는 동산은 오색찬란하여 아름답게 보일 것이나 단 하나의 꽃으로만 덮혀있는 동산은 단조로와 보기에도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발전되어온 다양한 영성도 이와 비슷하다. 다양성 안의 일치(unitas in diversitate)는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개인의 영성적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룬다는 영성으로서 보편 교회의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영성은 우열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각자의 존재 양식(modus essendi)에 따라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격려하고 지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건설하도록 힘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 자기와 다른 영성생활이나 생활 양식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교회 안에 큰 영성 학파 내지 영성의 흐름을 주도하는 단체들은 대부분 수도회들이다. 수도회들은 두 개의 큰 방향을 띠고 있다.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가 그것이다. 서양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베네딕도 수도회는 원래 봉쇄 수도회였으나 시대의 요구에 따라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그 외 갈멜회,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예수회 등 큰 수도회들이 각각 고유한 수도회 영성을 확립시켜 왔다. 근대 이후 교회의 쇄신과 선교의 목적으로 설립된 수많은 남녀 활동 수도회는 시대의 징표와 요구를 깨달은 열성적인 사람들의 영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 돈 보스꼬의 영성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끝난 후 일어난 신심운동들, 특히 우리 나라에 전파되어 열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운동(.M.B.W.), 포꼴라레( Focolare),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꾸르실료(Cursillo), 부부 주말 피정(Marriage Encounter) 등은 훌륭한 영성에 바탕을 둔 신심 운동들이다. 작은 형제회의 영성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극을 주며 관상 수도회는 활동을 중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일깨워 준다.

수도회 외에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또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들 안에서는 다소 특이한 영성이 있어 왔다. 중세기 교회의 영성, 근대의 영성, 현대의 영성이 있어 왔으며 불란서 교회의 영성, 라인강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신비가들의 영성 그리고 동방 교회 영성이란 용어들이 등장할 정도로 독특한 영성이 발생하여 교회의 삶을 풍부하게 해 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막의 영성이란 말처럼 각 시대와 민족, 지역 그리고 개인에 따라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이 실로 다양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2. 성경과 영성생활

굳이 제 2차 바띠깐 공의회 문헌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학은 성전과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초로 삼고 있다. 영성생활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시작되어 성장 발전되어 왔으며 역사 안에서 그 유산이 축적되어 왔다. 성경이 제일 먼저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며 인간을 부르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하셨으므로(에페 1,9) 인간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나아갈 뿐 아니라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었다(에페 2,18;2베드 1,4).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은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출애 33,11;요한15,14-15)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일찌기 성 아우구스띠노는 고백록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우주의 주인이시자 진선미성(眞善美聖) 자체이신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고 흠숭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찬 존재임을 증언한 바 있다. 인간은 이렇게 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로 끌려가듯이 인간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며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바로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는 데 있는 것이다. 영성이란 바로 이러한 인간성을 전제로 한다. 성서에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부르시는 하느님의 활동과 그분을 만나며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여러 측면에서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의 높은 뜻과 인간의 타락 뿐 아니라 인간 개개인 안에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 제반 사항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이 너무나 좋은 분이므로 계속해서 만나려고 하며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더 욕심을 내어 만나고자 애쓴다. 이런 사람들의 행적과 그들이 남겨놓은 유산은 성서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찾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남겨 놓은 업적은 역사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영성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그것을 파헤치는 작업은 과거의 삶을 알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천년기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3. 유다교 유산

그리스도교 영성을 논할 때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유다교의 유산이다. “영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셈족이다”라고 한 교황 비오 11세의 진술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대한 가장 좋은 안내라고 보여진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뿌리인 유다교와 그 사상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 영성사를 충분히 연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유다교의 유산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 영성에 도움이 될만한 특징적인 요소들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유다교의 근본은 토라에 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토라는 단순히 율법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기원 전 3백년 경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부터 유다인들의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생활에 관한 교훈이나 그것을 집대성한 탈무드 역시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이다. 이는 분명히 예나 지금이나 유다인들이 보존하고 있는 신심의 본질적 자양분이다. 유다인들은 구약성서를 하나의 완성된 전체로 본다. 그들이 하는 독서의 기초는 모세 5경으로서, 이를 우리는 역사서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토라와 첫 번째 예언자들이다. 이는 또 유다교 회당의 전례서에 해당되는데, 이 전례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경건하게 성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례와 특히 큰 축제들과는 같은 맥락에서 독실한 유다인들에게는 성서해석의 기본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유다교는 창조주이신 유일신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있다. 그 기초를 다진 분은 모세이지만 그 기원은 기원 전 약 2천년 경에 생존한 아브라함에게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을 거쳐 하느님의 자비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유다인들에게 야훼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라는 신앙의 토대가 자리 잡혔다. 달리 표현한다면, 야훼 신앙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에게서 미리 예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야훼의 계시를 역사적으로 정리한다면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사건과 시나이 산에서 그분과 만남이 그 시효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야훼는 유다인들의 해방신이며 이를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선택과 약속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의 선택과 약속의 길은 십계명으로 드러났다. 이를 통하여 유다인들과 야훼는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 기본 사상이 구약시대의 신관과 인간관의 요체로서 유다이즘에 중요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십계명을 바탕으로 하여 각종 제사(번제, 희생제, 평화제 등)와 중요한 축제, 즉 빠스카, 오순절, 초막절 등은 야훼 하느님이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해방시키신 분임을 전례적으로 표현한 의식이었다. 그리고 야훼는 거룩한 신이니 그분을 본받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인 사상과 더불어 정의 구현도 중요한 사회 생활 지침으로 규정되었다. 유다이즘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영성적 특징 내지 가르침은 다음의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부르시는 하느님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유독 유대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만민에게 구원과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 선택은 유대 민족이 특출하기 때문도 아니고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도 아니며(신명 7,7) 다만 하느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여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의무를 다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를 듣고 지켜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너희는 지켜야 한다(신명 4,1-2). 그것은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느님은 유다인들의 신이 되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상으로서 이는 구체적으로 십계명으로 드러났다(출애 2장). 시나이산의 그 계약은 구원계획의 본질적인 면모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유다교는 본질적으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계약의 종교이다. 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택하신 은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 쪽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전 존재를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계약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맺은 계약을 한결같이 지키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당신을 싫어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려 멸망시키시는 분이다(신명 7,9-10).  이와 같이 하느님은 당신이 택하신 그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순수함의 표현을 “나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하셨다(출애 20,5). 이는 그 백성에게 대한 애틋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타인의 성공이나 탁월한 지위를 질투하는 그리스 신들의 행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계약을 맺은 그 백성이 다른 신에게로 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것은 율법 준수로 드러났다.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서 많은 박해를 받은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추방되고 흩어져 살면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킨 율법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갔다. 국가제도와 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율법이란 모세 오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이다. 바로 계약을 통하여 이런 사상이 성장하고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선민(選民)에게 필요하면 당신의 권능을 유감없이 드러내시면서 당신이 우주만물의 통치자이고 인간의 생사를 한 손에 쥐고 계시는 지존이심을 보여주시면서도 당신의 백성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시는 친숙함도 보여주셨다. 이와 같이 이중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특성은 비할 데 없는 권능과 충실함, 자부적인 사랑과 자비로운 온유함으로 드러났으니 이를 체험한 많은 유다인들에게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신심이 발생하게 되었다. 모든 유다인들에게 친숙한 기도인 쉐마(Shema)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는 흠숭과 사랑, 지고지순의 경신행위, 가장 친밀하고도 마음을 들어올리는 믿음이 완벽하게 혼합되어 있다. 쉐마의 기도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님이시다. 그분 왕국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세세에 찬미받으소서! 너희는 우리 주 하느님을 너희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생각을 다 바쳐 사랑하여라!...? 이 기도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산물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드러난 전능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즉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인격적이시며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또 다른 훌륭한 기도인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도 있다. 이는 단순히 “그 기도”라고도 한다. “오 주님, 제 입술을 열러 주시어 제 혀가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 주 하느님, 저희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크시고 강력하시며 가장 높으신 하느님, 주님은 당신의 충실한 종들에게 풍성히 베푸시며 만물의 주인이시오니 저희 선조들에게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시고 저희 자손들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실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기꺼이 도와주시고 구원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임금이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오 주님, 아브라함의 방패이신 분.....”


 2) 야훼이신 하느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 하느님을 의미하는 야훼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종합해 보면, 바로 “그분이시다” 또는 “과거에 나였던 것처럼 나일 것이다” 또는 “있는 그분”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재이신 분, 자존(自存)으로서 “그분은 있도록 하신다?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신다” 라는 의미가 있다.


 3) 창조주이신 하느님

야훼 하느님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시는 전능하신 분이자 절대자이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 하느님은 지성과 의지를 갖춘 인간을 당신의 모상을 따라 창조하시어 낙원에 살게 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므로 선민들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근거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에게 달려있다고 고백하였다. 그분은 존재의 근원이시다. 또한 피조물의 다양한 차이점은 확실히 다양한 피조물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사에 달려있다. 하느님의 창조적 현존이 드러나는 다양한 방식의 주요한 존재론적 근거는 각 피조물의 존재 그 자체 안에 있다. 즉 피조물의 본성과 완전성의 정도 그리고 하느님께 유사한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하느님 앞에 있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인데 그 거울이 미소한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각 피조물은 하느님의 무한히 빛나는 영광을 반영시킨다. 보다 완전한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창조적 현존이 그들 안에 뚜렷이 드러나므로 하느님을 보다 잘 반영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은 그분의 흔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양한 창조적 현존의 실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게 한다. 그래서 선민들은 여러 가지 기도, 특히 시편으로 기도하였다. “하늘에서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의 천사들 모두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찬양하고 하늘 위의 하늘들, 야헤의 명으로 생겨났으니,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148,2-6) “숨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150,6). 이와 같이 선민들은 신앙적인 통찰로써 피조물 안에서 드러나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기도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4) 사랑의 하느님

이는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신 것에 충실하신 면을 드러내는 말로서 충실성, 항구성, 성실성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느님은 거짓말을 안 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민들, 특히 모든 것을 다 잃고 이방 나라로 끌려간 이들도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학에서는 이스라엘의 신 야훼의 속성을 출애굽기 34장 6절-7절에서 찾는다. “나는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 그렇다. 성서의 많은 구절 중 이곳은 하느님의 속성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구절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헤세드(hesed)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사랑을 의미한다. 헤세드는 계약적인 사랑, 자비로운 사랑, 사랑스러운 친절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의 대표적인 표현이 예레미야서에 나온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31,3). 예언자 호세아에 의하면 하느님은 백성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들에게 진실을 다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보이신다. 하느님의 이런 사랑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에메뜨(emet)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신 것에 충실하신 면을 드러내는 말로서 충실성, 항구성, 성실성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느님은 거짓말을 안 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민들, 특히 모든 것을 다 잃고 이방 나라로 끌려간 이들도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축제와 전례

축제들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선민들에 의해 기념제나 이와 유사한 것들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축제와 전례는 단순한 충실함에서 신심 깊은 기념제에 이르기까지 창의적이고 속죄적인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보장이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선민들은 성서를 통해 드러난 사건들을 재음미하였고 하느님의 업적들을 재현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가장 큰 축제는 셋이다.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이다.

파스카는 보통 과월(過越) 또는 유월(逾越)로 번역되는데, 이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은 이집트인들의 집을 쳐 그들의 장자들을 멸하셨으나 그 피가 묻어있던 이스라엘인들의 집을 통과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지나가게” 하셨다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이 축제는 그들에게 해방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선민 의식을 강화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민족 단결 내지는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다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깨닫고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다. 오늘도 이스라엘 후손들은 그 축제일에 누룩이 들지 않는 딱딱한 빵과 쓴 풀을 먹으면서 자기들의 조상들이 당한 고통스러웠던 삶을 재현한다.

오순절은 빠스카 이후 50일째에 지켜진 축제로서 맥추절이나 칠칠절로도 불리우며 밀의 수확을 감사드리는 축제였다. 후대에 이르러 이 날을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진 날로 재해석하여 율법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민들은 빠스카가 국민의 탄생이었다면 오순절은 그들 종교의 탄생으로 여길 정도로 성대하게 지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순절을 지내면서  영성적으로 다시 시나이 산으로 돌아가 그 때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선물로 받으면서 맺었던 게약을 새로운 신심과 사랑 안에서 갱신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께 감사드렸고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느꼈다. “의인들아, 야훼께 감사하며 기뻐 띄어라. 수금 타며 야훼께 감사하고 새로운 노래로 찬미하고 흥겨운 가락에 맞춰 우렁차게 불러라. 야훼께서 당신 겨레로 뽑으시고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신 민족은 복되리니?시편 33장)

초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칠 일간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했고 팔일 째에도 거룩한 모임을 열고 야훼께 제물을 바친 축제였다(레위 23,33-38). 원래 이 축제는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을 거두어들여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제와 동시에 신년제도 겸한 농경시대의 행사였는데, 후에 선민들이 경험한 광야의 고초와 유랑의 천막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성적으로 재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세상으로부터 성별되고 따로 떼어져 오직 신앙 안에서 분리된 민족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축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축제는 그들에게 스스로 쇄신되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매년 며칠간 사막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천막을 치고 사는 유목민이며, 이 세상에는 머물 성읍이 없어 언제가는 오게 될 성읍을 기다리는 순례자와 나그네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옛날에 생겨나서 성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고 불리워진 이 삼대 축제 외에도 보완적인 여러 가지 축제들도 생겨났다. 이 축제들 역시 선민들에게 많은 영적인 교훈을 주었다.

속죄의 날은 전 국민의 죄를 보속하는 대제일(大祭日)로서 1년에 한 번 거행되었다. 이 축제가 레위기에서 중한 여러 의식 중 중요한 것임은 이스라엘온 회중이의 모든 죄가 속죄되는 알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7월 10일, 모두 일을 쉬면서 단식하고 다사제는 자기와 그 가족과 전 민족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레위 23,26-32). 이리하여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단식은 그들에게 뉘우침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즐거운 날(초막절)이라기보다는 슬픔의 날이었다. 제물은 드리는 이의 신분에 따라 희생동물을 달리했다. 대사제는 숫송아지, 온 회중도 숫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일반인은 암염소나 어린 암양이었다. 이런 동물을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극빈자는 고운 가루 얼마를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뿌림절은 에스델 9장 20절 이하에 등장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시며 온갖 모함과 고난 속에서도 승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인들은 해마다 아달월 십 사실과 십 오일 이틀간 축일로 지켰다. “이 달은 쓰라림이 기쁨으로 바뀌고 초상날이 축제일로 바뀐 달이요, 이 날은 유다인들이 원수에게서 풀려 난 날이라, 이 날을 기쁜 잔칫날로 지내며 선물을 주고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는 날로 삼으라고 하였다(에스델 9,22).

성전 봉헌축제(제단봉헌축제)는 율법에 충실했던 마카베오의 주도하에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던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기원 전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린 것을 기념하여 유다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이 축제를 지낸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이 땅에 머무시기를 원하시며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나 언제나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6) 거룩하신 하느님

계약에 의해 알게된 하느님의 속성 중에 유다이즘에서 가장 두드려진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표현대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이사 6,3).

거룩함이란 너무나 좋고 엄숙하며 성스러워 보통의 것과 특별히 다른 것으로서 일상의 것과는 분리, 차단되고 존엄하며 초월적이다. 그러므로 드높고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으며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다.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유한하고 약하며 죄로 오염된 인간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순수하며 신비스러운 신성(神性) 그 자체이시다. 하느님께 가까이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인간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였다. 즉 지고(至高)의 위대함이요, 도덕적이면서 동시에 물리적이요, 비할 바 없이 고양된 것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뿐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온갖 만물을 초월한 것이요, 그러면서도 전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복종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위대함이다. 그것은 아모스가 공포한 불변적 정의의 고귀함인 동시에 호세아가 약속한 무한한 자비의 고귀함이다. 이 둘은 실제로 친숙하게 인격적이면서도 전체 백성에게도 공통적인 그분을 만난 체험에서 하나가 된다. 선민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처럼 살아 계신 분을 뵙고 난 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에 놀라 즉시 그분 면전에서 땅에 엎드려 뵙게 될 분을 믿은 것이다. 모세처럼 그분을 만난 사람도 이제는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사야에게 일어난 것처럼(이사 6,5-7) 제단에서 날아온 불타는 석탄이 더러운 입술을 정화시켰으므로 그들은 세라핌 천사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부를 수 있었다. “거룩하시도다, 그 이름 거룩하시도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들이 쉼 없이 찬미하나니, 주님은 하느님이시오 왕이시며 위대하시고 거룩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오 주님, 하느님, 임금님, 거룩한 분이여!” 이 찬가는 에스레에 나오는 기도이다.

 계약을 통해 토라를 받은 선민들은 그것을 무거운 짐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멍에로 여겼다. 왜냐하면 비록 약한 인간이나 은총과 친교와 하느님과의 계약의 측면이 토라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엄한 율법이지만 선민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물인 토라는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 11,44;19,2;20,7)는 말씀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윤리생활과 성덕을 닦기 위한 수행생활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7) 윤리와 신비주의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 라는 야훼의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거룩하신 야훼를 본받아 선민들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선택과 말씀을 제일 먼저 받고 믿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 그를 부르신 하느님은 그에게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창세 17,1)라고 하셨다. 그리고 최초의 예언자는 모세이다. 그는 율법을 준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 안에서 또 자기 주변에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생생히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위대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선민은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때는 그분의 눈밖에 나고 만다.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이렇게 된다. 그러나 그분께 순종하고 전적인 신뢰로 그분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느님은 모두 받아들이신다. 토라는 선민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성덕에 대한 요구였으며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데 있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 11,44). 거룩함에 대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을 수 있다는 절대적 의미는 아니다. 즉 하느님처럼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자이므로 그분은 모든 가능적인 표상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은 제작이 금지되었다. 다만 이스라엘인들은 의식적인 면에서 모든 불완전함과 불결한 것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이러한 항구한 금기 사항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거닐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주님의 뒤를 걷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만 따르고 그분만을 공경하여라. 그의 명령만 지키고 그의 말씀만 들어라. 그분만 섬기고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라”(신명 13,4).

선민이 하느님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정화 예식을 한 것은 죄 때문이었다. 즉 죄는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대한 불복종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성서 전체에서 흐르는 한 현상은 선민들은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반항적이고 고집이 센지 잘 안다”(신명 31,27)라는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이집트 탈출을 후회하였고(출애 14,1이하) 씬 광야에서 이집트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불평하였다(출애 16,3). 만나를 먹을 때도 하느님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으며(출애 16,16-20)그들의 외고집과 우상숭배는 모세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탁월한 주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충과 불경 중에서도 그들의 제일 큰 죄악은 우상숭배와 배교였다.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계약을 맺은 선민이 그 하느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큰 죄악이었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가서 제물을 드린 행위나 이교인들의 신들을 끌어들여 신당을 세우는 행위들은 모두 배반으로서 큰 죄악이었다. 이와 못지 않게 큰 죄악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호세아가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더 좋아하신다고 말한 것을 중시해야 한다(호세 6,6). 선민들은 인간의 실수와 죄를 깊이 느끼게되자 통회의 기도와 여러 속죄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통회의 기도인 시편 51장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 다윗이 죄를 범한 후 뉘우치는 기도이며 각자의 죄와 집안의 죄 그리고 전 백성의 죄를 벗기는 속죄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죄의 윤리화는 유다교를 도덕의 종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영성화 시켜 나갔다. 가장 두드려진 예가 찬미와 연결된 특별한 형태의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식을 통한 전례가 바로 인간과 하느님이 만나는 행위이고 유다이즘의 한 형태가 신비화되어 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재(內在)와 초월, 현존과 부재(不在) 사이에 긴장감을 주시지만 선민들은 구름과 불기둥, 계약궤와 성전을 통해 “하느님이 거기 계신다”고 믿고 찬미와 감사, 영광과 흠숭 그리고 속죄의 제사를 올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례가 바로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함이고 그 자체로 “신비스런 만남”을 강조하는 종교로 전체 윤리 생활을 바꾸려는 일종의 종교적 감각의 심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교가 요구하는 마음의 정화는 단순히 내적인 올바름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주인이시자 인간의 생사를 온전히 주관하시고 약속에 충실하시며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지향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은 선민의 역사 속에 드러나셨고 그들에게 권능을 드러내셨다. 하느님은 개개 인간의 역사 안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셨으므로 선민 전체에게 그분의 약속과 요구를 동시에 이행하도록 신비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 의미는 결국 하느님께서 선민을 위하여 끊임없이 행하신 그분의 사랑으로써 그들의 온갖 배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비 지극한 사랑을 베푸셔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 데 있다. 이와 같이 성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은 다양하고 항구적이며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었다.

그들은 그 위대한 두 분이 간 곳을 하느님의 도시 천상 예루살렘으로 여기고 그리워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곳은 천사들이 만군의 야훼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자 영원한 고향이다. 그 곳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토라를 연구하여 신심을 키워나가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묵상함으로써 자양분을 얻고 하느님의 현존(쉐키나) 의식을 통해 그분의 빛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 앞길은 당신의 빛을 받아 환합니다.”(시편 36,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창조와 그 보존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드러나나 선민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사건들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더욱 강렬하게 피부로 느꼈다. 불기둥, 번개, 구름, 폭풍 등을 통하여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셨고(顯現) 마지막에는 솔로몬의 성전 안에 현존하셨다. 이를 랍비들은 쉐키나라고 표현하였다. 쉐키나는 원래 천막이라는 뜻이다. 선민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천막을 치지 않았던가?(참조.출애 25,8-9). 천막, 장막, 오두막 집 등 머무는 장소를 의미하는 이 말이 하느님의 지상 현존 장소의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예언자 요엘과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지상 현존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제야 너희는 알리라. 내가 하느님으로서 거룩한 산 시온에 머무는 줄을?요엘4,17;참조. 에제 43,7). 그러나 그분은 불경스러운 눈에는 현존하지 않으셨다. 이런 생각은 점차적으로 영성화 되어 갔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현존이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떠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심 깊은 이들은 뉘우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때 그분은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여 쉐키나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현존이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 그것을 육안으로 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간절한 청원을 드렸던 것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시편 42,2). 목마른 암사슴이 시냇물 만나기를 애타게 그리듯이 야훼 하느님 만나기를 간절히 그리는 영혼!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그들의 영도자 모세가 그 산 위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더불어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말씀을 나눈 그 사건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간절히 염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다른 위인들의 삶도 묵상하였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로 불려 올라간 엘리아와 에녹은 그들의 눈에는 분명 사랑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담뿍 받은 위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에녹)를 데리고 가신 것이다(창세 5,24). 엘리야는 “난데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열왕하2, 11).


 8) 경건자들과 유다인의 신심

율법과 전통에 충실했던 선민들 중에는 유다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헌신 봉헌된 서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지르인들로서 글자 그대로 “성별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끊고 일체 포도의 열매로 된 음료나 식료를 취하지 않았으며 서원 중에는 그 기간이 끝나는 날까지 머리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손이다. 그의 강한 힘은 머리카락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시체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모와 형제자매가 죽었을지라도 문상은 물론이고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정해진 것으로 여겨지는 식물에서도 일체 멀리해야만 했다. 포도주와 포도를 원료로 한 식물을 금지시킨 것은 가나안 문화와 그 종교와의 절연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며 술과 인연 깊은 가나안 토착의 농경신에 대하여 인간의 올바른 삶을 주관하시는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순화를 목표로 했던 것 같다. 머리털은 하느님의 명하심에 참여하는 신체의 주요 부분으로서 그분께 드릴만한 합당한 제물이자 그분과의 친교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시체와의 접촉은 종교 의식상의 큰 부정 중의 하나였다. 이런 금기 사항들을 잘 준수해야만 나지르인으로서의 서원 기간을 잘 채우는 것이었다. 만일 어기면 서원의 일수가 무효가 되어 정해진 의식을 다시 해야만 했다. 서원 기간은 30일, 60일, 7년, 21년 또는 종신토록 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정적으로나 종신적으로 야훼 하느님께 헌신하여 봉헌된 자들이었다.

이들 외에 특별한 신심을 보인 이들은 하시딤이라고 일컬어지는 경건자들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스모네 가문(BC 163년 이후)이 독립전쟁에 승리하여 민족의 긍지를 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사제직을 독식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사제직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사제 직분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했던 경건자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던 경건자들은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던 경건자들은 에쎄네파를 만들었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안에 있는 규정은 물론이고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주던 전통까지도 존중하고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들로서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지 않던 사람들과는 분리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특색은 레위적 정결을 엄수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도 모르는 무리 같은”(참조.요한 7,49) 일반 대중들로부터 “분리된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 천사들, 후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라시아들은 6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하여 의를 얻는 다고 보고 율법 준수에 충실하였으나 점차적으로그 실천이 형식적 순결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나 본래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위선에 빠지기도 하여 후대에 이르러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쿰란을 중심으로 모여 수도생활을 하던 에쎄네파의 출현은 이러하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사제직을 찬탈하고 그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까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족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수도에 힘썼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BC 103-76)때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의 수도자들은 사악한 대사제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으며 사막에 살면서 하나의 신앙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공동체는 사제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의 교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의 임금인 메시아와 사독 계통의 대사제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대사제들이 지키던 정결 예식을 철저히 준수하였고  육체의 불결을 피하려고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시편 42,4의 정신처럼 공동체 안에서 신적인 질서를 확실히 깨달아 마지막 시대를 준비하는 자들로서 자기들의 삶을 제물로 봉헌하기 위한 마음의 관대함을 누리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다. 빛의 아들들의 규칙에는 쿰람의 사제들이 비록 예루살렘의 동료 사제들과 같은 길을 자기 않았지만 그들의 제물 봉헌만은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이 즐겨 받으실 향기로운 저녁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이미 예견한 것처럼 진지하게 수덕에 힘썼다. 그들은 비록 의식적인 제사를 거부하지 않았으나 예루살렘의 기존 사제들과는 분명히 다른 구별된 삶의 양식을 지킨 사람들이었으며 야훼의 법에 충실한(시편1,1-6;37,31;119,34-35) 사제와 수도자들이었다.

사두가이파들은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장려하고 세속적이었으며 하스모네 왕가와 로마의 식민 정권과 결탁하였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여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하였으며 오직 모세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하였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불멸과 하느님의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사라졌다.

그러나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 정결법, 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그들은 “율법도 모르는 무리?참조. 요한 7,49)였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난의 정신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극빈자들이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빈궁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자신의 비참과 부족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며 자신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 역시 가난한 사람이다. 자신의 영적 빈곤을 아는 사람은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존재를 맡긴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에서는 야훼의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옹호하며 수덕에 힘쓴 이들의 정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에서 과부, 고아, 이민자들은 물질적으로 버림받은 불쌍한 이들이다. 이 작은 무리는 빈곤과 비참, 착취의 희생물이다. 가나안 정착과 왕정시대 그리고 유배 이후에 가난한 이들은 소외된 자들로서 그들의 삶은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의미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외국인들 앞에서 스스로가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착취자들인 부자들과 하느님을 모독한 불경자들과 분리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신뢰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야훼만이 자기들의 해방자와 유일한 왕으로서 자기들을 보호하고 방어하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가난한 자로 여기는 이들은 복된 가난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들로서 그 근원을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에 둔다.


 9) 베라카

유다인 신심 중에 전레와 연관된 특출한 의식이며 그리스도교 성찬 의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 베라카(berakah)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다인들은 대개 성전의 희생제사에 집착해 있었다. 그러나 유다교의 신심은 의식을 통해 영적 영양분을 얻고 전례를 통하여 신심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특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희생제와 함께 시편을 노래하였다. 현대 사가들은 예언과 토라는 그 근원을 전례 거행이 있을 대마다 사제들이 권위있게 가르친 말씀에 두었다고 본다. 유다인들은 바빌론 유배 이래 그들의 신심을 회당에서 행해진 예배로 방향을 돌렸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성서 봉독에 의해 영적인 양식을 얻는 기도와 묵상적으로 성서를 봉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즉 의식이 성경 봉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되어 기도로 표현되었고 말씀이 공포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축복과 감사제인 베라카가 나왔다. 그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희생제를 드렸다. 그 제사에는 적절한 시편들이 첨가되어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희생의식의 영성화를 볼 수 있고 신심깊은 선민들의 모든 행위를 거룩하고 진정으로 의식적인 행위로 만드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체성사 거행을 감사제라고 한다. 베라카를 우리는 그리스도교 이전 유다 영성의 통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음식에 의식상의 축복을 내린 후 잔치의 주례자가 종교적 격식에 따라 빵을 쪼개는 것을 시작으로 잔치의 모든 행위를 거쳐 최후의 잔에 장엄한 축복을 내렸다. 이들이 나눌 친교의 음식은 하느님이 마침내 당신의 모든 백성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당신의 왕국으로 불러모으실 메시아의 잔치를 실제로 미리 기대하는 것이었다. 밤을 밝히는 빛을 축복하고 축복된 향을 살라 바치는 의식, 주례자가 손을 씻은 후 다음과 같은 감사기도를 바치도록 모든 참여자들에게 권고하였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 그 다음 장엄한 기도가 이어졌다. 그 기도는 오늘까지 유다 전례에서 바쳐지고 있으며 이 기도에서 미사 감사송의 개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의식 은 창조와 과월절에 의한 최초의 속량을 상기시켜 주며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이어진다. 매일 먹는 음식과 하느님에 의해 알게된 지식에 대한 감사가 뒤따르고 봉헌과 믿음에 의한 포기 그리고 닥쳐올 종말론적 미래에 이루어질 마지막 탄원의 기도가 뒤따른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사와 유사한 베라카는 유다교 신심의 자양분이 흘러 넘치는 전례였던 것이다.


 10) 그리스 유다이즘

유다인들은 외세의 침략과 생업을 위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많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중심지는 그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였다. 그 도시는 지중해에서 인도와 아라비아를 잇는 그 당시 세계의 접합점이었으며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여러 민족들이 교역하던 항구 도시였다. 다행히도 본토 헤브레아 말을 모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성서가 번역되자(칠십인역 성경은 기원 전 250년 경에 시작되어 200년 경에 완성됨)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다이즘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는 성경이 그리스어로 옷을 입음으로써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다인들 사이에 상당한 세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나 기타 지역의 그리스 풍 유다인들은 유다교 영성의 가장 분명한 모습에 대해 경탄할만한 믿음의 증거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그리스. 유다교적 사고와 종교적 특성은 처음엔 유다교로,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교로 침투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약성경, 신플라톤사상, 스토아 사상, 신피타고라스주의의 종교철학이 혼합되고 그들의 신비적이라고 할만한 신심이 혼합되어 그리스 유다이즘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성서 주석에 있어서 비유적 해석이 이 곳에서 발달하였다. 그들은 비록 본토를 떠나 있었으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돈독히 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이룬 공동체에서 독특한 신앙활동을 한 인물은 철학자로 이름이 높은 필로이다. 그는 기원 전 25년에 출생하여 65세를 살았다. 그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었으나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완벽한 그리스어를 구사한 필로는 정한 때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하였으나 저술가와 철학자로 이름이 높다. 그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는데 신플라톤 사상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플로티노스의 신비사상은 거의 필로에게서 나왔다고 보여지며 그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전환기를 잘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그 중의 일부가 그리스도교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와 암브로시오, 유스띠노 등과 중세기의 유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필로의 사상은 구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게는 성경이 인식의 왕도였다. 그는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였으며 그 시대의 절충주의의 영향으로 특히 스토아 사상을 민족종교의 교의에 적용시켰다. 그는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필로의 영향을 받은 어떤 교부들은 플라톤이 그리스말을 하는 모세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필로의 사상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시고 온전히 선하시며 피조물과는 온전히 다른 타자(他者)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어떤 속성을 덧붙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성질들을 초월하여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2) 성서의 창조론을 인정한 그는 좀 색다른 견해를 편다. 창조는 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영원한 물질에서 생긴다. 그런데 물질은 악한 것으로서 인간에게 죄악의 원인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의 윤리학이 등장한다. 그것은 그가 할라카의 관심으로 성서에서 끌어낸 삶에 필요한 율법과 그리스 사상의 혼합이라고 보여진다. 인간은 정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영혼의 무덤인 육체로부터 정화되어야 하며 인간에게 있는 격정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3) 그의 로고스설은 하느님과 세계 사이에 어떤 중개자가 있다는 데 있다. 그 중개자는 랍비들이 메므라흐(Memrah)와 천사들에 대한 추리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메므라흐는 하느님의 특별한 말씀, 심부름꾼, 대표자, 중개자, 또는 천사이기도 하다. 또한 로고스는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이며 하느님의 지혜와 일치한다. 세계는 이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며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고 세계에 위안을 주며 하느님 앞에서 세계를 대표한다. 이런 이론을 전개한 그는 인간이 이 지상에서 할 일은 영혼의 무덤인 육체에서 벗어나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를 통해 하느님과 일체가 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를 벗어난 탈혼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프뉴마, 즉 영혼에 의해 이런 일치에까지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하늘의 지혜의 길이다. 그는 성서에 몰두하여 자신의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동족을 신앙에로 끌어들이려는 열성으로 차있던 인물이었다.

4.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심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잘 알아야하며 그분의 가르침에 정통해야 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시기로 예언된 분이셨으며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이 세상에 오셨다.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 4,4-5).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분은 인생의 올바른 길잡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보여주고 제시하신 길을 성실히 감음으로써 우리는 영성의 꽃을 피울 수 있다.


 1) 역사의 예수

그분은 지극히 겸손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팡파르를 울리고 “물렀거라”를 외치는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집도 절도 없는 비천한 집의 한 아이로 오셨다. 태어날 방도 없어 마굿간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지만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한 때 이분의 역사성을 부인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떠들썩한 사건들과 유명한 인물들에 관심이 많았던 세속의 역사가들이 지나가는 투로 슬쩍 언급한 것들이 그분의 지상 역사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줄이야.

여기서는 예수님의 역사성을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비그리스도계 여러 문헌(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유대고서, 타키투스의 연대기, 쁠리니우스 2세의 서간, 수에또니우스가 쓴 “황제들의 생애”에서 다룬 “끌라디우스의 생애? 바빌론 탈무드들을 통해서 그분의 역사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현 교황님의 사목 서간 “제삼천년기” 5항도 참고할 수 있다.

한 편 그리스도교계 문헌들인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성과 그분의 정체성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며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묵시 1,8;21,6), “처음과 마지막”(묵시 21,6)이신 그분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된 분으로서 헤로데 대왕 생존 시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베틀레헴 촌락에서 탄생하셨다(마태 2,1;루가 1,5;2,4). 약 30년 간 나자렛에서 숨은 생활을 하셨는데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양부 요셉이 목수였던 것으로 보아(마태 13,55) 그 당시엔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그대로 물러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목수나 건축 기능공으로 활동하셨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는 말씀에서 그런 인상을 풍기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가족 사항에 대해서는 어머니 마리아, 양아버지 요셉 그리고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 형제들과 누이동생들이 있었다(마르 6,3). 가톨릭 신자들은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이심을 믿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을 친동기로 보지 않고 가까운 친척들로 인정한다. 한 편 개신교에서는 그들을 친동기로 보며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동정이셨지만 그 후에는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였으므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는 주장이나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교육 수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분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셨고(루가 4,16-30)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분의 교육 정도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을 지킬 뿐이다. 혹자는 예수님을 석가나 공자 또는 소크라테스처럼 위대한 인물이나 지도자로 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그들과 비교하여 그분의 교육 수준을 들먹이기도 하지만 성서는 그분의 신성(神性)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성질이 아니라고 본다.


 2) 하느님 아들이 사람이 되심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다른 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이란 그 신비를 깊이 고찰한 후 그것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의 신비는 강생의 신비이다. 즉 혈육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요한 1,14)으로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사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셨으나 그분의 존재는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친숙한 분으로 드러나지는 않으셨다. 이런 점에서 강생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초월적이고 위엄 있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하느님, 즉 사랑이신 하느님이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느님 아들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서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신성”(골로 2,9)을 지니신 그 아드님 안에서 하느님은 매우 친밀하고 명확하게 인간과 이 세계와 결합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셨다. 그 찾아 나서심은 말 잘 듣는 양 아흔 아홉을 제처 놓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비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타락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양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표명으로서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또한 강생의 신비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가? 말씀이신 그분이 자신을 무한정 낮추어 인간의 본성을 지님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위격과 일치하게 되어 마침내 인간성을 신격화하여 초자연적 상태로 상승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랑의 사도인 사도 성 요한께서 간단하게 가르쳐 주신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1요한 4,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요한 5,2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의 생명, 즉 강생하신 말씀이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공유하시는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생명을 통하여 인간은 재생되어 초자연적 상태로 들어 높여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혼합되며 자연적인 것이 파괴되지 않고 완성되고 고양되나 양자는 언제나 구분되고 분리된다.

이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강렬하게 체험한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됩니다."(로마 8,14-17).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의 신분이라면 강생하신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영성생활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이것을 묵상하고 여기에 맞도록 사는 것이리라. 현 교황님은 “제삼천년기”에서 구속적 강생의 신비에 연원을 두고 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사는” 종교이며, 하느님의 참 생명에 동참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의미이며 하느님의 심오함을 살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신비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적으로 말해서 경천애인(敬天愛人 또는 어떤 이들은 愛主愛人이라고도 함)에 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크냐는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은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르12,28-31).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 사도 성 요한의 말씀을 빌리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요한 21,25) 그 말씀들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바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이웃 사람을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이란 이를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주제와 더불어 예수님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하느님의 나라

이는 예수께서 설교하신 한결같은 주제로서 특히 산상설교(마태 5-7장), 평지에서 하신 설교(루가 6,17-49)와 여러 비유 말씀에서 발견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구약성경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상으로서 하느님의 통치 또는 지배와 주권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느님은 우주의 통치자로서 대자연과 인류의 역사, 특히 선택받은 벡성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다. 이는 영토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고 하느님이 이 지상에 통치자로서 군림하는 것 또는 그분의 의지와 주권의 실현을 의미한다. 성서에서는 “아버지의 나라”(마태 13,43), “당신의 나라”(마태 6,10), 예수님을 메시아로 본 후에 사용된 “그리스도의 나라?1고린 69;갈라 5,21)라고 사용하기도 하였다. 세상은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죄이래 하느님 아니 다른 세력이나 사상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하느님의 지배하심이 드러나는 그 때는 어떤 능력이나 악의 세력도 힘을 쓰지 못하고 굴복하게 되며 사랑과 의로우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회개 촉구의 설교 동기로 삼았다(마태 3,2). 예수님의 설교 역시 하느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마르 1,14).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할 만큼 예수님 설교의 중심이 되었다(4,17.23;5,3). 13장에는 여러 가지 비유로 하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셨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특징은 곧 그 나라의 임박과 그 곳에 들어가 그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마태 7,21). 그 나라에의 돌입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때와 “일어날 징조” 또는 “시간” 등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시며 묵시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신다(마르 13장). 그러나 루가 사가에 의하면 묵시문학적 표현과는 달리 현재적이고 내재적인 표현을 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17,20). 이를 두고 여러 학자들은 예수님의 본 의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을 내세웠다. 종합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미래적, 가지적, 묵시문학적 현상이거나 영적 내지 정신적 불가시적 것을 강조한 것이거나 아니면 두 견해를 종합하여 하느님의 나라는 “벌써”(jam)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nondum) 견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업적과 인품으로 보아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으므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절대적이다.


  (2) 회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 그렇다. “시간의 충만함”(갈라 4,4)은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가 구세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분의 강생, 30여년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때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고 활동하심 등은 모두 인간의 구원을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행위이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보답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수적이다. 회개란 악의 생활에서 발길을 돌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악행을 중단하고 선을 행하며, 보다 정확하게는 정의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마태 9,13;루가 3,11). 예수님이 원하시는 회개란 전인적인 회심이다. 하느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분께 등을 돌린 모든 것, 즉 세속적이고 악마의 세력 하에 살아온 삶에서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려 그분의 아드님이 선포하신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 이는 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변화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맨 처음 부름 받은 제자들이다(마르 1,1620). 제자들의 소명과 추종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 회개를 받아들여 은총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그 다음 조건은 세례이다. 즉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여기에 대하여 사도 성 바오로는 보다 확실히 언급하신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1고린 6,11). 그러므로 회개와 기쁜 소식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3) 가난한 이들의 복음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구원을 알리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구약의 아나빔과 같은 사람들이다. 루가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이 설교는 예언자들을 거쳐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유다 영성이 기술하고 있는 놀라운 포물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심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충실한 사람과 같은 의미이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으므로 그분의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가 예언한 “남은 자”와 같은 이들로서 창세기에서 성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낙관적인 약속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빈궁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다. 즉 자기 자신의 영적인 빈곤을 알아 오직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가난이야말로 복된 가난이며(마태 5,3) 인간의 처지를 잘 알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도 통한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된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성모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주님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46-53).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9,23). 이는 부(富) 그 자체를 단죄하셨다기 보다는 구원을 가로막는 부의 위험을 경고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력(金力)은 마력(魔力)으로 둔갑한다. 이는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부자 청년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하느님께 마음이 송두리째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포기된 어떤 것이 고귀하고 행복의 근거가 될 때에만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재물의 포기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4) 자기 극복 및 수행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강조하셨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완화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셨지만 느슨한 삶은 경고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마태 7,21-23)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올바른 윤리생활을 강조하셨다. 윤리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간이 되게 한다. 또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자기 포기를 강조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참조 마르 8,34-38). 어떤 의미에서 영성생활이란 수행의 삶을 말한다. 세례자 요한은 정의를 요구하였다. 군인들은 정당한 임금으로 만족하고 세리들은 정당하게 세금을 받고 일반 서민들은 자선을 실천해야만 했다(루가 3,10-14). 그러나 예수님은 더 엄하게 요구하셨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까지도 포기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5-26). 이런 가르침들을 볼 때 주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올바른 윤리생활을 영위해야 하고 그분을 좀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자기를 끊는 수행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분을 따라 나서는 삶은 확실히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이다. 어떤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포기된 것이 고귀하고 행복의 근거가 될 때에만 훌륭하고 가치있다. 그분을 인생의 올바른 길잡이로 삼고 따라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행자(修行者)의 삶을 사는 것으로 드러난다. 영성생활이란 어떤 의미에서 수행의 길을 걷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이를 분명히 하셨고 누구든지 이를 통하여 그분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그 수행의 행렬은 그분이 외치신 이래 약 2천년이 지나도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으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분의 말씀에 매력을 느껴 그분을 따라나서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복이 있을진저!


  (5)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요한 3,16)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이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동.17절). 예수님이 설교하신 하느님은 만민의 아버지이시다. 이 보편적인 부성상은 우선 대자대비하신 아버지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그리고 어떤 죄인이라도 뉘우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그분께 나아가면 다 용서하신다(루가 15장). 그분은 예수의 아버지시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사가들은 부자 관계를 대단히 친숙하게 표현한다. 아드님은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셨고 찬미 감사드렸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마태 11,25)라는 고백에서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 하느님은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다(마태 11,27).  그러므로 아드님은 자신 있게 이렇게 천명할 수 있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마태 19,32). 심판과 연관시켜 루가도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구너을 주신 것처럼...?루가 22,29). 한 걸음 더 나아가 루가는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친숙한 부자 관계인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증언한다(2,49;24,49는 특별히 의미있는 대목들이다).

“나의 아버지”와 연관시켜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아들이란 예수님이 자주 자신에 관하여 언급하신 칭호이다. 다니엘서 7장의 영향을 받은 묵시록의 용어로 본다면 이 칭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심판하실 초자연적인 인물로 드러난다. 그는 전권을 지닌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호칭한 그 맥락 안에서 감추어진 자신의 초월성에 대한 것만큼 자신의 인성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분명하게 들려졌을 것이다.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그리고 자신을 그분의 아들로 지칭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청중들로 하여금 어느 예언자가 그들을 기다리게 한 것보다도 훨씬 더 진하게 자신의 초월적 성격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분이 이런 식으로 권위있게 말씀하심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그분의 태도와 죄를 사하는 권 선포 등은 서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이란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칭호의 의미가 고양(高揚)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는 제자들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이를 인정하였을 것이고 제자들의 지상적 메시아관도 점점 분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은 예수님과는 동상이몽으로 끝나긴 했어도 제자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부자일치 사상이 당연하게 제시되고 있다. 전형적인 표현은 이것이다:“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이는 신적 친자성(親子性)을 확실히 말하는 대목이다. 이는 요한 복음의 사상과 일치한다. 하르낙(Harnack) 같은 이는 이를 공관 복음서 안에 있는 요한계 유성(流星)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태와 루가 안에서 아드님의 친숙한 기도로 표현되어 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앎이 곧 아들의 앎이니 그 관계는 실로 오묘하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친숙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마태 11,25-27;루가 10,21-22).


  (6) 예수의 메시아성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신 예수님은 사람들과 특히 제자들에게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시대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기적을 행하사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언변과 능력으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압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분명히 지상의 메사아로 드러나셨다. 앞에서 다니엘서 7장의 암시와 그 본문이 모든 묵시문학 안에서 광범위하게 반향하고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궁극적 의도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부터 하느님에 의해 파견된 천상적 인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지칭하신 후 즉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사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다(마르 8,3;9,31). 제 1차 수난 예언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난감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스승을 나무란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로마 군인들을 다 몰아내고 과거에 화려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왕국을 재건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셨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겸손된 자세로 봉사할 것을 강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므로 제자들에게 더 이상 주저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사야 53장에 대한 암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사람의 아들”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악의 세력을 판단하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통치가 맡겨져 있다고 사람들은 여겼던 것이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그 야훼의 고통받는 그 종은 바로 사람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님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척받으며 그분의 무죄한 고통들과 죽음은 바로 죄인들의 속량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신약성서는 그 고통받는 종을 과감하게 예수님께 돌렸다. 비록 후기 유다교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제외한 어떤 사람에게도 그 인물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전통들과 후기 그리스도론들도 이를 기초로 하여 확립되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열쇠는 예수님에게 있다. 그분은 자신을 고통받는 종으로 인정하였을까? 사람의 아들과 고통받는 종에 대한 두 예언적 인물이 다소 차이가 있어도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적 의미가 있다. 그 점은 예수님의 핵심적 가르침들 중의 하나이다.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은 지상에 있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온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나 인간이 모습을 하고 있다. 반대로 그 종은 모든 이들로부터 배척당하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인물이며 자기의 상처로써 모든 사람들을 치유한다. 예수님은 인간성의 새로운 유형, 즉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성의 모델로 제시된다. 즉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자발적인 비하로써 우리 죄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셨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신적 부성이 사랑하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 안에서 빛나고 있다. 이는 복음이 강조하는 아가페적 사랑의 극치이다.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음”(1고린 1,18)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죄으 l 짐을 대신 지고 가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메시아)이시다.  


  (7) 이웃 사랑 

하느님을 먼저 섬기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법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펴신 다음 이웃 사랑 실천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여기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마태 6,9-13)와 고별사(요한 13,34-35);15,9-12)에서 두드려 진다. 고별사는 그분의 유언과도 같다. 그만큼 이웃 사랑실천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신 그분은 사람들에게는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다. 만민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칭할 때 만민은 모두 형제 자매들이 된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다. 여기서는 인간 사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갈등을 배제한다. 즉 신분 구별이나 인종 차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용서와 화해의 중요성, 복수동태법(마태 5,38-42)의 극복,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등이 그분의 중요한 가르침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37)에서 타인의 특별한 상황이나 필요에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기준(마태 25,31-46)에서는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해 주는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실 만큼 이웃 사랑실천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결부시키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에 놓으심으로써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요한 13,34)라고 하심으로써 형제애의 상호 인격적 국면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2)라고 하셨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그분의 제자들의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들이 모두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위격이시나 사랑 안에서 완전히 하나인 것처럼 일치되기를 원하신 기도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사랑의 실천은 세상 시초부터 끝나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인간 본연의 삶이다. 교회는 그 시초부터 항시 여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으며 새로운 천년기를 바라보는 20세기 후반이나 세상 종말 때까지 교회는 그 가르침을 가지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수행자들은 그것을 화두로 수행에 정진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실천할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이므로 하늘나라에서도 사랑만 남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이는 세상 종말 때까지 우리가 기도와 수행으로 성취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으뜸 사도 베드로에게 주님은 “시몬아, 너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고(요한 21,15-17) 율법학자에게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라고 하셨다.


  (8) 십자가의 죽음

사람과 아들과 고통받는 야훼의 종에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다. 그것은 그분의 비참한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세 번이나 예언하셨고 원로들과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그분의 수난사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으나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은 이러하다. 그분은 인류의 죄악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 죽음은 인류를 구속하신 사건이다(참조. 로마 5,6-8). 왜 하필 십자가의 죽음인가?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인가? 신앙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해답이다. 그 당시 가장 비참한 사형 방법은 로마인들이 하던 십자가 처형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를 알아보자. 이런 주제는 사순시기나 수난 묵상용으로도 좋을 것이다. 로마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는 가느다란 채찍을 사용하였고 노예에 대해서는 작은 뼈가 달린 채찍이나 납덩어리가 달린 채찍을 사용하였다. 유다법에 의하면 채찍질은 39번이나 40번이었으나 로마법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예수님께 가해진 채찍질은 납덩어리를 단 채찍이었던 것 같다. 옷을 벗기고 손을 기둥에 묶어 놓고 등을 쳤다. 이런 고문은 치는 손이 지쳤을 대 혹은 총독이 그만 하라고 명령할 때 중지하게 되어 있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형 집행 전에 돌이 깔린 광장에서 태형을 당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롱을 당하셨다. 군인들이 그분께 왕처럼 옷을 입히고 왕관 대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왕홀 대신 갈대를 손에 쥐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롱하면서 침을 뱉고 머리를 때렸다. 십자가는 종목과 횡목으로 되어 있었다. 종목은 골고타 언덕에 세워져있었으므로 횡목만 지고 가셨다. 그러나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라 더 이상 지고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키레네 사람 시몬을 징발하여 대신해서 지고 가게 하였다. 영문도 모르고 변을 당한 시몬은 성서가 읽혀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분으로 알려진다. 이유인즉, 사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며, 이 부분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시몬의 아들 알렉산드로와 루뽀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임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런데 인류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분은 바로 자기들 아버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하여 고맙게도 자기들의 아버지 이름이 성서 안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해골산 또는 두개골 언덕으로 끌고 가 포도주에 아라비아 향유인 몰약을 타서 마시게 하였으나 그분은 거절하였다. 맑은 정신으로 최후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양 발목에 못을 박아 세웠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들을 사복음서를 통하여 모두 모은 것이 가상칠언이다. 그분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의인이 바치는 기도인 시편 22장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셨고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리고는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하시고 돌아가셨다. 때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3시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예수는 십자가의 치욕적인 횡사(橫死)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도 환멸과 체념 끝에 머두 자기네 가족과 옛 직업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예수의 설교는 모두 거짓으로 판명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분의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분은 미리 예언하신 대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이다.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태 16,21).


 4) 신앙의 예수

예수님의 부활 신앙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있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꼼짝없이 그분께 사로잡힌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옳고도 옳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15,14). 이제 그분은 역사의 존재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셨고 시공을 초월하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공간을 넘어 두루 편재하는 분으로, 생성소별 법칙을 넘어 불사 불멸하는 분이 되셨다. 역사적 인물이 초월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으로(1고린 15,45) 또는 신령한 분으로(요한 20,14-18) 존재하신다. 아니 계시지만 두루 계시는 분. 그분의 부활은 원시교회 신앙 공동체가 전해준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전승이었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1고린 15,3-5).

그분의 부활과 발현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다(빈 무덤 사화, 마르 16,1-8;요한 20,1-3; 사도들의 설교, 사도 2,14-39;3,12-26 등;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마태 28,9-10;요한 20,14-18;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마태 28,16-20;루가 24,13-35;사도 1,6-11 등)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우선 그분한테 꼼짝없이 사로잡혀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다.” 그리하여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사건으로서 잠시 절망하고 단념한 자기들의 성소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부활 체험은 하느님과의 만남, 즉 신체험(神體驗)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그들이 체험하고 깨닫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거쳐 궁극적으로 도래한 하느님 나라라는 현실이요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은 그 발현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종말론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생명의 근거와 목표로 모신다는 것이며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해드릴 뿐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그들 신앙의 기본구조가 형성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양식을 구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가신” 그 파스카는 그분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도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한다. 

이제 흩어졌던 제자들은 한데 모였다. 그들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확신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은 다음부터 더욱더 견고해졌으며 스승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모두 깨닫고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기보다는 그렇게 하도록 전능하신 분의 손길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5. 원시교회와 사도들의 활동


 1) 마지막 명령

승천하기 직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은 기쁜 소식의 전파였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 복음 전파야말로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천상적 힘과 용기와 지혜를 담뿍 받은 제자들은 땅 극변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우선 그들은 성령을 받은 그 날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모인 군중들에게 용감하게 설교하였다(사도 2장).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확신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그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승리이며 악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인정하여 이를 열심히 증언하였다.


 2) 성령의 역할

예수님의 지상 생애 중 성령님과의 관계는 실로 오묘하다. 몇 군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루가 1,26-38).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알아보았고(루가 1,42) 아직 어미의 태중에 있던 세레자 요한도 기뻐 뛰놀았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 때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강림하셨고 그분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전교 활동 중에 예수님은 어느 날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 “하늘과 땅의 아버지...”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아신 그분은 이승에서 그들과 헤어지기 직전에 그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가 24,48-49). “위에서 오는 그 능력”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이시다. 그분은 능력(dynamis)이시다. 다이나마이트의 위력을 아는 사람은 이를 너무도 잘 이해할 것이다. 능력의 성령께서는 약한 제자들을 강하게 만드셨다. 지상의 메시아관으로 꽉 차있던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라지자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절망하고 번민하여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라(루가 24,13-14). 스승의 승천 직전에도 지상 왕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제자들은 “바로 지금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스승의 충고를 조용히 받아들인 그들은 묵고 있던 이층 방에 모여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사도 1,14). 과연 오순절에 약속된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3). 그들은 용감해졌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열심히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들의 스승은 지상에 계시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자는 성령. 그분의 힘으로 제자들은 열심히 스승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라. 얼마나 용감해졌는가? 원래 어부였던 그는 무식하였다. 용감한 척 했으나 하녀의 질문에도 스승을 간단히 배반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렇게도 용감하게 대중 앞에서 부활하신 스승을 증언하다니... 그것은 부활하신 그분을 목격한 체험과 성령의 은혜를 담뿍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영(spiritus, pneuma, ruah)은 정상적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용을 일으키거나 인간의 삶에 활력을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생동감(生動感)있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드러난 성령은 하느님의 영, 얼 곧 생명의 근원이요 생기를 주는 숨이나 물 또는 타오르는 불과 같다. 성령은 천지가 혼돈 중에 있을 때 그 위에 감돌던 기운이며(창세 1,2) 삼라만상이 꼴을 갖추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운행되도록 이끄시는 힘이다. 인간의 창조 설화에서도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내어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생기가 돋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창세 2,7).

야훼의 기운은 예언자 에제키엘을 들로 끌고 나가 메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환시를 보여 주셨다(에제 37,1이하). 말라빠진 뼈들도 야훼의 기운을 받으면 살아난다는 그 환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견한 것이지만 그 숨은 곧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창조 설화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코에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창세 2,7). 예언자 다니엘은 영의 인도를 받아(다니 13,46)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여인 수산나를 구출하였다. 이 때의 영은 선과 악을 식별하여 하느님의 공의하심을 적절히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에 대하여, "나를 믿는 이는 (마시시오).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의 강이 그이 속에서 흐를 것입니다"(요한 7,38)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 곧 위로자 빠라끌리또( Paraclitus)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6-17) 승천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사도 1,8). 제자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dynamis epelthontos tou hagiou pneumatos)을 받아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며 스승의 뜻을 받들어 제자다운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성령을 받은 그들은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놀랍고도 역동적인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능력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사도 성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전도할 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령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바울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하자 그들은 모두 성령을 받고 "여러 언어를 말하고 또 예언을 하였다"(사도 19,6). 바로 그 신령한 기운이, 곧 성령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 기운을 입으면 누구든지 역동적인 힘(dynamis)을 내기 마련이다.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 인해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의 능력을 입으면 육체를 지닌 인간이라도 육체의 욕정에 따라 살지 않게 된다. 그 신령한 기운은 그런 힘까지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본능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그 영의 기운을 받아 살아아 한다. 그 영이 지배하는 곳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어(2고린 3,17) 악을 이길 수 있는 자유까지도 누릴 수 있다. 진정으로 이런 자유를 누리는 자는 윤리적으로 부정한 행위들(갈라 5,20-21)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간다(갈라 5,22-25).

또한 그 기운은 생명을 주는 영이므로 이 영에 따라 사는 이는 생명력을 상실한 법조문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법의 근본 정신을 다라 살게 된다. 왜냐하면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다(2고린3,6;1베드4,6). 또한 그 기운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오류의 영을 식별하여(1요한 4,6) 성화의 길을 걷게 한다. 그 영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성전이 되어(1고린 3,16;16,9) 주님과 하나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1고린 6,17). 이는 마치 복중에 있는 태아가 어미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받듯이 그 영과 하나되어 사는 그리스도인도 끊임없이 그 영의 생명력을 받아 활기찬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삶이며(1요한 4,9) 그분의 도움을 받아 더욱 더 풍성해지는 삶으로써(요한 10,10)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갈라 4,6)로 부르며 그분의 자녀다운 삶을 성실히 살아갈 뿐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인생의 유일한 길잡이와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삶을 본받는 수덕생활에 정진하게 된다. 또한 그영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번째 위격인 성령이시므로 성화의 원동력이시다. 그러므로 수덕생활에 정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2고린 2,15 이하) 성덕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런 영혼은 영적인 인간이 되어 사도 성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춧돌인 사도들의 삶을 주관하셨다. 성령의 은사와 그들의 생활과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대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의 이상적인 모습이자 신앙 공동체의 귀감이다. 그러므로 쇄신을 부르짖는 이들은 누구나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초대 교회로 부르고 있는가? 초대 교회가 어떠했기에 교회 쇄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그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운영되는 교회였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운영되는 교회인 것이다. 성령은 성화의 원동력이시므로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운영되고 그 구성원들이 영으로 충만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유명한 아테나고라 대주교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이 안 계시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무시며, 교회는 단지 조직체에 불과하고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의 선교는 선전이고 전례(의식)는 고풍에 불과하며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운영되었다. 우선 교회의  탄생은 승천 직전에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일러 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4-9). 과연 오순절에 위로부터 성령이 강림하시어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3). 그리고 그 교회의 성장 과정을 보면 성령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명한 율법학자 가믈리엘은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사도 5,38-39).

신자들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사로 충만한 삶을 살았으며 그 공동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성장을 주님께 돌리고 있다."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 2,47).

그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서로 나누어주면서 살았다. 또한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모였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참조. 사도 2, 43-47;4,32-37). 여기서는 특별히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중요하게 보고 싶다.


  (1) 공동 소유 - 친교의 공동체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사회는 이상적인 공산 사회였다. 이런 사회는 가톨릭 교회의 수도생활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수도자들이 아니었다. 공동체를 통한 수도생활은 약 3세기 이후 빠꼬미오(Pachomius, +346)시대에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들은 자발적으로 재산을 공유하면서 가난을 없애고 신앙 안에서 친교를 나누면서 살았던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서로 친교를 나누면서 살았던 것이다. 친교(親交, koinonia)는 루가 복음사가가 이 부분에서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으나 사도 성 바오로는 서간에서 13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친교는 성서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이며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신앙인들이 상호 일치하여 누리는 유대와 책임감을 의미한다(2고린 8,4;9,13;갈라 2,9-10). 즉 공동체 구성원들이 상호 간에 느끼는 따뜻한 친밀감 내지는 공동체적 공감(sensus communitariu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마음과 마음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영육간에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공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까지도 함께 나누는 이상적인 공산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다"(사도 4,32-36).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2)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따랐다. 그리하여 "날마다 성전에 모여" 기도하는 시간에는 함께 참여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신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구약의 열심한 이는 야훼의 법과 옳은 판결을 좋아하여 "하루에도 일곱 번씩 찬양하였다"(시편 119,164). 경건한 유다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였다. 이 관습에 따라 사도들도 제 3시(오전 9시), 제 6시(낮 12시; 사도 10,9), 제 9시(오후 3시)에 기도하였다(사도 3,1;10,9).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서 모여 기도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도이다. 그들은 기도에 열중했던 것이다. 기도는 인간의 일이라기보다는 엄격히 말해서 하느님의 일이다.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못한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에 그들 안에 기도할 마음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3) 빵을 떼었다.

이 표현은 유다인들의 축제 시에 행하던 의식의 시작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빵을 떼셨고(루가 24,35) 믿는 이들은 주간의 첫날에 주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빵을 떼었던 것이다(사도 20,7). 빵을 뗀다는 표현은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특별히 성찬을 위한 전문 용어이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여 주님께서 행하신 최후의 만찬과 그분의 죽으심을 기념하였던 것이다(1고린 11,24-26). 그 의식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던 것이다(2,46;4,32).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집회를 위한 큰 장소가 없었다. 빵을 떼고 나누기 위하여 모인 장소는 가정이었으며 그것은 작은 가정교회였다. 그들은 분명히 소수였다. 거대한 유다교 체제하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빵을 떼는 그 의식에서 확인되고 더욱 힘있게 결속되고 있었다. 그 결속은 빵을 떼고 나눈 그 의식 안에서 체험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믿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펴고 놀라운 일을 하였던 것이다(2,43-46). 그리하여 믿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4) 박해를 당하였다.

성령을 받기 전의 사도들은 겁장이들이었다. 자기들의 스승이 붙들려 끌려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 그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과 혀 모양의 성령을 받은 다음부터는 달라졌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설교하며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였다(사도 2,14-36; 3,12-26; 4,9-12. 19-20;5,29-32)). 스테파노 역시 담대한 증거자였다(사도 7장). 그들은 비록 박해를 당해도 모두 열성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라는 것이 그들의 응답이었다. 


  (5) 선교에 치중하였다.

사도들은 승천 직전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마르 16,15)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성령을 받은 그들은 선교열에 불탔다. 필립보가 이티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고(사도 8,26-39) 베드로는 이방인 관리 고르넬리오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사도 10,34 이하).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다인들로부터 다른 민족에게로 넘어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유다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그리고 안티오키아까지 주님의 말씀이 전해졌고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정식으로 사도단의 결정에 의해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6) 사도단의 결정에 함께 하신 성령

신도들이 많아지자 유다교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로 인해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사도 15, 1-2). 더구나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신도가 된 몇 사람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를 베풀지 않도록 결정하고 야고보 사도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나 목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말 것과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결정하여 편지를 써보냈다. 이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사도 15,28)라고 한 사도회의는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을 제시한다. 이는 사도들의 결정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뜻이다. 성령의 강림 사건으로 창립된 교회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운영된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열린 첫 번째 사도들의 회의에서 성령의 놀라운 작용으로 인해 모든 분쟁의 소지가 일소되고 좋은 결정들이 나왔으며 선교사들은 열심히 전도에 힘쓰게 되었다.


 3) 사도 성 바오로

이방인들의 사도 성 바오로! 원시 교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많이 전하신 분! 선교사들의 모범..... 수없이 많은 칭호를 붙일 수 있는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의 사상을 다루어왔으므로 감히 이분의 영성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쑥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여러 측면에서 간단하게 다루고자 한다.


  (1) 인물

지난 세기의 여러 학자들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사도의 성격을 역사적이고 심리학적 방법으로 묘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그의 초인적인 행위들을 분석한 결과 그 서간들은 지나치게 과장적이며 믿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들의 노력과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를 떠난 시도는 신비성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활동과 서간을 통해서 심리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구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러낭 같은 사람은 우리의 사도를 “못생긴 작은 유다인”이라 하였고 아뽈로와 비교해 볼 때 미남자도 아니었고 언변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1고린 3,4이하;사도 18,24). 그러나 그분의 열성만은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하였을 것이고 질그릇 같은 부족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난 것(2고린 4,1절 이하)은 의심없는 일이다. “사탄의 하수인”과 육체의 고통(2고린 12,7)이란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그분이 앓던 병에 대해서는 신경증에서 눈병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설이 난무하지만 어느 견해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상상적으로 보아 그의 병은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빠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라는 요구로 볼 수도 있다. 하여튼 우리는 여러 견해와 가설을 뒤로 하고 성서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길리기아의 다르소에서 출생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성장하였고 위대한 율법학자 가믈리엘 지도하에 율법을 배웠으며 바리사이, 유다인 중의 유다인(벤야민 지파), 로마 시민, 예수를 믿던 그리스도인들을 압송할 권한을 대사제로부터 받아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나 박해자에서 전도사로 변화되어 불같은 열성으로 부활하신 그분을 전한 분,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진실을 외친 분(갈라 2,14), 세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가 신비로운 영상을 보고 계시를 받은 분, 부활하신 예수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수한 고초를 당한 분.....이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감히 유다교적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신앙 체험

사도 성 바오로는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주님을 만났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신체험을 했듯이 비슷한 사건이 사울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1절 이하).

 바로 이것이다. 이리하여 박해자가 전도사로 변화된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은 다음...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사도 9,19절 이하). 그는 성령을 선물로 담뿍 받았으며 하늘까지 불려 올라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듣기도 하였다(2고린12,10). 그리하여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에게 사로잡힌 영적인 사람이 되어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의 보화(에페 3,8)를 깨달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십니다?갈라2,20)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3) 두 아담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범죄하여 그 후손들인 인류는 죄의 노예 상태에 처해있었으나(로마 5,12이하)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었다. 즉 옛 인간을 상징하는 아담과 새로운 인간이자 부활하신 아담 그리스도와의 대립 개념은 사도 성 바오로의 고유한 체험이자 중요한 개념이다. 로마서 5장과 1고린 15장은 두 아담, 즉 두 인간성의 원리들을 제시한다. 즉 옛 인간 아담은 외적 인간으로서 타락하여 단죄되고 새 인간 그리스도는 영적인 인간이자 천상적 인간이며 내적 인간으로서 의롭게 된 분이다.

사도 바오로는 두 아담을 대비시킨 후 구원적 의미로 방향을 잡는다. “한 사람(아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12-21). 이 내용을 정리하면 첫 번째 아담은 불순종, 범죄, 유죄판결, 죽음의 순서로 제시되나 구원자이신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는 순종, 하느님의 은총, 무죄판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생명)라는 대비가 성립된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대비에 머물지 않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다시 한 번 위에서 언급된 이사야 53장의 직접적인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이 주어지는 것이다. 


  (4) 죄와 죽음

첫 아담의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죄는 마치 신비스러운 전염병처럼 첫 아담에게서 시작되어 전 인류에 통치권을 확장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병이나 결함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책임져야할 부정적인 힘으로서 죽음을 가져왔는데(참조. 로마 5장.7장) 인간이 죄와 죽음과 맺는 관계를 바오로는 로마서 6장에 기술하고 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음에 붙여진 상태(16절)와 죽음은 바로 “죄의 댓가”이다(23절). 그러므로 바오로는 절규한다. “누가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로마 7,24). 그 해결은 두 번째 아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반대로 그분은 순종을 통해 죽음으로써 생명과 정의를 베풀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였다. 그분의 죽음으로 죄의 노예상태가 파괴되고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례를 통해 그분의 죽음과 일치될 수 있다(참조. 로마 6장).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심으로써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세례를 받고 그분과 하나된 이들은 누구나 은총 속에 살아가게 된다.

  (5) 은총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은총은 신적 관대함의 표명으로서 보다 각별히 예외적이며 유일한 표명이다. 은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진 풍성한 선물, 전적으로 공짜로 주어진 매우 과분한 것, 참으로 좋은 것, 인간의 상태를 보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좋은 것, 심지어는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자신 또는 하느님 자신이 은총이다.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직, 즉 박해자에서 선교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보고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았다”(로마 1,5)라고 하며 심지어는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덕분입니다.(1고린 15,10)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을 총망라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며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상속자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그분의 양자가 된다.

은총의 선물은 다양하다. 공동이익을 위하여 공동체에 베푸시는 은총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지혜, 지식, 믿음, 치유, 기적, 선교, 분별, 이상한 언어, 해석 등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이 주어진다(1고린 12,1-11). 그리고 교회 안의 직책, 즉 사도, 선교사, 교사, 기적을 행하는 자, 치유하는  자, 봉사자, 지도자,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자, 이를 해석하는 자도 은총이다. 그러나 더 큰 은총의 선물은 사랑이다(1고린 12,27-13장).

  (6) 천상적 인간

천상적 인간은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일으켜진 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은 놀라운 비하이자 하느님의 무한한 관대함에서 나온 구원적 행위이다. 그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존재의 선물이다. 그분은 자신의 부활로써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드러나셨다. 그분은 자연적 생명체였던 아담과 대비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으로 빚어졌지만 두 번째 아담은 하늘에서 나신 분이다. 흙으로 빚어진 모든 인간은 첫 번째 아담의 형상을 지녔으나 장차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참조. 1고린 15,45-53). 그러면 우리의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게 될 것이며 죽을 몸은 불사(不死)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참조. 2고린 5,4). “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천상으로부터 ”오시는 두 번째 아담의 은혜이다. 그러면 우리는 발가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에서 첫 번째 아담은 범죄 후 자신이 발가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썩을 몸은 생명 안에 흡수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적인 것은 천상적인 것에 흡수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자연적인 인간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간성인 새롭고 영적이며 천상적인 인간성과 함께 “위로부터 옷을 입을” 것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례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우리를 일치시킨다면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에페소 서간에서 명백히 말하고 있는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세례로부터 나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이자 새로운 존재를 이미 실제로 소유하는 것이며 아직 보이지는 않으나 확실히 신앙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미래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희망을 다해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참조. 로마 8,24-25). 이를 확인해 주는 분은 성령님이다.


  (7) 성령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모든 서간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서간은 로마서이다. 이 서간은 숭고하고 깊이 있는 교리를 지닌 서간일 뿐 아니라 사도의 마지막 서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영적으로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쓰여진 것이므로 어떤 면에서는 그의 사상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7장까지는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는 비참한 자연적 인간을 논하고 8장부터는 성령을 받은 영적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오로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선과 악의 투쟁을 절실히 체험한 후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로마 7,23-25)라고 절규한다. 그러다가 8장에서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켰다.....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2-6절)라고 고백한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이들은 마음속에 성령을 모시고 다닌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며 육체를 지닌 인간이라도 육체의 욕정에 따라 살지 않게 한다. 이런 면에서 “영은 살리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자유를 누리며 온갖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2고린 3,3) 소개장을 지니고 다니므로 자유를 누릴 수 있다(2고린 3,17). 이와 반대로 성령의 지도와 반대되는 육정이 맺는 열매는 온갖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로서 사람을 추하게 하며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서지 못하게 한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참조. 갈라 5장 16-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한다(1데살 5,19).  

 성령은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분의 영”이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술되기도 한다(참조. 로마 8,1-11).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內住)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게 한다(참조. 로마 8,9-11).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8)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완덕(完德)에 이를 수 있다.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신다(참조. 에페 2,4-7). 모든 것을 당신 아드님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 평화, 자유, 빛, 지식 그리고 용기를 주신다(참조. 로마 5,8-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고 그분과 이루는 일치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1고린 1,30). 사도 바오로 시대의 개종자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성이나 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자 사람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존재에서 존재로 신분이 상승된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효과 외에도 초자연적으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삶을 산다고 자부하였던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을 160회 이상이나 사용한다. 이는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그가 의미한 것은 육체에 의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로마 1,3-4;1디모 3,16)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지금은 천상에 계시며 초대교회가 믿고 고백한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적인 존재 양식을 갖춘 주님이시다(2고린 3,17). 그러므로 천상의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시다(1고린 15,45-49). 그분은 능력과 영광을 아버지와 동일하게 누리시며 같은 본성과 속성을 지니시므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당신의 신성에 참여시키신다. 따라서 한 인간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분을 믿는 순간부터 그는 영광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참조. 로마 10,5-10). 이런 생동적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를 단순히 신비적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신비는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분위기 안에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간적인 유대를 가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는 사실상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두 인격체가 서로의 현존 안에서 상호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관점에서는  가능하다. 사랑의 속성은 사랑하는 두 대상이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치는 정신적이며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표현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표현은 융해나 흡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치는 상호 인격적이며 상호 합일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로서 일치이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리면 접을 붙이는 것이다(로마 6,5).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갈라 3,27)으로 합체되며 그분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이는 일찍이 주님께서 최후만찬 석상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은 것이다(요한 15,1). 돌감을 단감에 접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돌감이라면 그리스도는 단감이시다.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초자연적으로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마치 수족이 몸에 붙어있을 때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듯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에게 의존함으로써 은총 상태에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 1고린 6,18).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고 있다면 받는 존재는 주는 존재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같은 원리로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초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참한 죽음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나누어 받아야 한다. 즉 그분의 빠스카의 신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주고 묻히고 부활하고 마지막에는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참조. 로마 6,3-14).

 그러므로 결론은 자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물학적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주님과 공생(共生, symbiosis)하는 것이므로 세례성사의 은총을 살며 그 효과 안으로 자신을 투신하여 죄에 죽고 쇄신과 승리의 삶을 지속적이며 점진적으로 사는 것이다(참조. 로마 6,8;골로 2,13). 그것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새 인간이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을 따라 새로워져서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참조. 골로 3,10). 이런 영혼은 사도 바오로와 함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0)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대한 초보적 교리를 넘어 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히브 6,1)


  (9)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오로의 또 하나의 생생한 개념은 몸과 머리의 개념으로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여러 지체들이 모여 있다. 그것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선물과 그 선물들의 상호 보완에 대해서는 로마서(12,4-5)와 고린토 1서(12,12-13)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각 지체는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제 구실을 다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각 지체는 상호 보완적이며 높고 낮음과 귀함과 천함이 없다. 하찮게 보이는 지체들도 건강을 위해서는 중요하며 몸의 미소한 부분이라도 아프면 온 몸이 아파오며 심하면 병이 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들은 상호 협조하여 건전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그 빵”을 함께 나눔으로써 가능해진다(1고린 10,16-17).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교회이며 상호 관계적인 면으로 보아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참조. 에페 1,22-23).

  (10) 양자(養子) 입적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주시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그분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신분이 된다(로마 8,15-17;갈라 4,5-7)). 즉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그 상속은 확실히 자녀직분이다. 그것은 믿음의 삶 안에서 성장 발전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 삶의 핵심은 성령의 선물들 안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선물인 사랑(아가페)이다(1고린 13장).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통하여 세례를 통하여 받은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부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생 여정 안에서 성령의 지도와 아가페를 실천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점진적으로 동화된 삶을 살 게 된다. 그 삶은 새롭게 변모된 삶으로서 “내적 인간”이다. 그것은 죽음에 굴복한 “외적 인간”이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지는 삶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동화되어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될 삶이다(참조. 2고린3,17-18;4,16-17).

  (11) 육체와 성령

사도 바오로가 의미하는 육체는 영혼에 반대되는 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성령에 반대되고 욕정의 열매에서 빚어지는 윤리적으로 좋지 않은 온갖 악의 출처이며 하느님의 영을 모시지 못할 온갖 부정적인 것의 근원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 인간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성령의 열매와 정 반대되는 것으로서(참조. 갈라 5,16-25) 여기서 말하는 육체란 생명의 숨결을 빼앗긴 존재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 사람들처럼 인간을 영육으로 이분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철저히 유다교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몸은 분리되지 않은 물질적이고 영적인 인간 생명의 유기적 통일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것은 인간 생명의 물질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영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히 구원된 인간의 모습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육체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령은 분명히 초월적으로서 하느님의 영이시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인간 존재의 깊숙한 곳, 바로 인간의 전 삶에 생기를 주며 이것에 따라 살아가도록 불려진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반면에 육체는 하느님 영의 지도를 받지 않고 순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다. 그 삶은 죽음을 향한 삶이며 거기로 과는 과정은 이미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육체적 욕정을 따라 살면 죽음이 오고 영을 따라 살면 생명이 보장되는 것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 8,5-7).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와 육정의 열매를 상세하게 제시하면서 성령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이를 잘 누린다고 역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분이기 때문이다(2고린 3,6). 이런 영혼은 주님의 성전이 되어(1고린 3,16) 주님과 하나된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마치 복중에 있는 태아가 어미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받듯이 그 영과 하나되어 사는 영혼도 끊임없이 그 영의 생명을 받아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바오로는 성령의 지도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육체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수행생활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12) 수행(修行)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 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고린 9,27).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가 수행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의 지도를 받는 영혼이라도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을 대항하여(참조. 에페 5,12)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적 투쟁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애쓰다” 또는 “노력하다”라는 말을 단 한 번 사용한다. “그래서 저도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사도 24,16). 성서 원문의 이 아스케인(askein)이란 말은 원래 꾸미다, 장식하다(특히 정신적으로) 또는 노동을 하여 준비하다, 타인에게 훈련을 시켜 적응시키게 하다 또는 기술, 특히 운동선수가 필요한 기술을 익히기 위하여 신체를 단련시키는 훈련을 의미하였으나 차차 그 의미가 변하여 철학을 연구하거나 덕을 닦는 의미로 사용되던 것을 바오로 사도가 수행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성생활을 신체를 단련하는 운동선수처럼 설명하기도 하였다(1고린 9,24-27;필립 3,13-13-14;2디모 4,28;1디모 4,7-8;히브 5,14;12,11).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라는 것을 잘 아는 영혼은 누구나 바오로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노력할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그분의 자녀다운 삶을 성실하게 살아 자녀직분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신도들에게 두 가지를 강력하게 제시하였다. 첫째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성실하게 살도록 권고한 것으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필립 2,12)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둘째는 자유라는 입장에서 방종한 삶을 책망한 것이다. 굛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1고린 10,23)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성실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방종을 피하고 수행생활에 항구해야 하는 것이다.


4) 사도 성 베드로의 서간


  (1) 첫째 서간

사도단의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원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다. 특히 주님의 승천 후에는 으뜸 사도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마티아 사도의 선발과 성령을 받은 오순절에 행한 설교와 사도들의 회의 등에서 그의 역할이 돋보인다. 여기서는 그가 보낸 서간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그의 영성적 가르침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소아시아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두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우리는 목자가 신도들에게 보내는 사목서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집필 연대는 네로 황제 박해 이전인 것으로 보이며 장소를 바빌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로마에서 썼을 것이다. 이는 그 당시 독자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법이기도 하다.

 종합적으로 사도 성 베드로의 서간은 신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중요한 교리(세례, 부활절 성찬식, 재림)와 건전한 윤리생활을 제시한 교과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서간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인의 희망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믿음을 가지게 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고 구세주의 피로 죄에서 씻겨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더구나 비신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더라도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신 그분을 본받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께 희망을 두는 자들에게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으며 시들지 않는 유산을 하늘에 마련해 놓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 희망은 자신의 구원을 위협하는 온갖 위험에서 벗어나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참 행복에 이르게 한다. 믿음에 바탕을 둔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다운 참된 기쁨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뻐하십시오”라고 힘있게 권고하였다.


        2/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삶, 인내

인생을 음미하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인내를 중시한다. 특히 박해를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인내이다. 황금이 불로 달구어져 불순물이 제거되듯이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당함으로써 믿음이 시험되고 완성되어 앙금이 없는 순금처럼 더 값진 것이 된다. 시련을 이겨낸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주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그 날에 착한 사람들에게 약속된 상급을 받을 근거가 된다. 인내를 통한 상급! 그것은 수난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을 전제한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성적인 승인이자 동의이므로 은총을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게 된다.


        3/ 성덕에 대한 권고

세속적 삶의 양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예전에 살던 대로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잘 순종하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여 거룩하신 하느님을 본받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는 권고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5,48). 구체적으로 모든 악의와 기만, 위선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구속된 자들처럼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체의 욕정과 여러 악한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4/ 권위에 대한 복종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세운 제도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에게 모범을 주는 생활은 사회질서를 지키며 국가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드러난다. 이는 모든 권위의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복종하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황제와 총독에게도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상하 질서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그 당시 사고방식으로 아랫 사람이 웃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인은 주인에게, 젊은이는 어른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부지간에는 상호 존경과 순종이 지켜져야 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실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5/ 성찬식과 사제적 백성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성전의 머릿돌이자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므로 사제의 일원이 된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2,5).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2,9). 이와 같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뭇 민족 가운데서 선택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성찬식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제사를 올리는 사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일반 사제직을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가르쳤다는 증거이며 그 당시 교회 안에서 사제직(원로와 감독)과 더불어 성찬식이 정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6/ 섬김과 봉사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강조되는 덕목은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에 따라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덕목이 강조되어 있다. 이 내용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사도께서는 교회의 최고의 목자로서 일반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절한 권고를 하였다. 교회의 지도자(사목자)들은 각자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잘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행하며 양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도 목자론에서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를 비교하면서 악한 목자는 양떼로부터 고기와 젖과 양털만 취하고 양떼를 잘 돌보지 않는다고 혹평하였다. 착한 목자들에게 주어질 상급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이다.

원시 교회나 구세주 강생 2천년을 맞이하는 20세기 막바지 교회나 섬김과 봉사는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덕목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주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서간


        1/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사도 성 베드로는 최고 목자답게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를 굳게 간직하라고 일깨워 주려고 한다.” 이는 최고 목자의 자상한 사목적 관심과 배려이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고귀한 신분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깨닫고 “믿음에 미덕을,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도록” 요청 받는다. 사도께서는 이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서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연륜이 깊지 않은 소아시아의 신도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목자적인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배려하는 교회 최고 목자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수 있다.


        2/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어느 시대나 이설(異說)을 가르치고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도 거짓 예언자들이 교회 공동체를 시끄럽게 하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고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착취하는 자들로서 음탕한 이단자들이나 반역자들과 협력하여 교회에 큰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 마술사 시몬의 제자들이거나 사도 성 바오로가 언급한 “십자가의 원수”(필립 3,18)들이거나 또는 고린토의 방종한 자들(1고린 6,12-20;2고린 11-12장)과 비슷하거나 또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니골라오파(2,6.15)에 속한 사람들로서 사탄의 비밀(묵시 2,24)을 안다고 자처하였고 발라암의 가르침(묵시 2,14-15;유다 1,11)을 유포하였거나 하느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한 죄악의 여인 이세벨(묵시 2,20)이 한 짓을 행하던 자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 당시에도 교회 안에 오류를 뿌리고 다녔고 그 이후에도 성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해야 하며 배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들은 온갖 감언이설로 신자들을 미혹하며 심지어는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2베드 3,4)라고 말한다.


        3/ 재림의 약속

주님의 재림은 확실하다. 그 재림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라도 그분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시어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이런 확신과 기대는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실천하고 거짓 예언자들이 저지르는 방종을 피하도록 한다(2,1-2,19).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므로 그 날을 기다리면서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참조. 3,15). 사도 성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1,16-18;참조. 마르 9,2-8) 영광 중에 오실 그분의 재림을 자신 있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풍조나 사조를 따르지 말고 영광스럽게 오실 그분을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5) 사도 성 요한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사도 성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진다. 그는 제 4복음서의 저자이며 세 편의 편지와 묵시록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20세기 들어 이 요한계 문헌들에 대한 비평적 견해들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요한계 성서에서 가르치는 영성적인 특징들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1) 복음


        1/ 로고스(말씀)

복음 서문에는 말씀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나온다. 로고스는 단적으로 말해서 삼위일체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퍼져있던 철학적인 이 용어를 그리스도교에 접목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다양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던 그 말이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다 적절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로고스는 필로의 로고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개념과는 더더구나 연관이 없다. 문제는 그것이 우주론적 추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것을 늘 이해했던 것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요한 사도의 로고스는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분명한 암시에 의해 처음부터 지적된 것처럼 예언자들의 구원적인 말씀이다. 로고스의 영원성(“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과 그 위격성(“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및 그분의 신성(하느님과 똑같은 분)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느님이시다. 그 말씀은 사람들을 위한 빛이다. 그 빛이 이 세상에 비치고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은 이 세상에 온 위대한 선구자 세례자 요한과 선민(選民)의 지도자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그분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선포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말씀의 내용이 되신다. 즉 그것은 구원의 말씀, 은총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과 살아있는 말씀의 바로 그 말씀이시다. 사도행전에서도 “말씀의 봉사”와 “그리스도 증거”는 하나이며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징표

복음에는 여러 징표가 나온다. 즉 예수님의 놀라운 업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 사건으로서 가나 혼인잔치, 고관의 아들 치유, 베짜타 못가의 병자 치유와 생명의 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초막절 기간 중 성전에서 가르치심,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치유와 세상의 빛, 라자로의 소생은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등의 표현은 모두 징표를 통하여 믿음을 준 사건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필요한 경우에는 이적을 통하여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드러내셨다.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초인적인 행위나 사건 앞에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분의 초인적인 행위는 도인들이나 기인들의 행위와는 달리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에 압도되어 그분을 믿고 추종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표징이 한 방법이었다.


        3/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

사도 성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을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은 다름 아닌 그분의 신적 특징이다.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같으신 분으로서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바로 그 “인자”이시다. 그분은 자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지식(앎)으로서 자신의 아들 신분을 정의하셨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요한 1,18). 그리고 그 유명한 사제의 기도에서 그분은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이 상호간의 앎은 상호 현존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17,21;14,10;참조. 3,35;10,17;15,10;17,24). 그분을 믿고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4/ 하느님의 자녀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소상하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범위를 확대시켜 당신을 믿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간의 앎은 사랑의 일치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상호간의 앎에 있어서는 완전하다. 이를 신학에서는 삼위일체의 대내적인 관계 또는 교류라고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알 때 그분과 일치될 수 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완전히 사랑하면 서로 완전히 알게 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분과의 일치를 통하여 그분을 점점 더 알게 된다. 예수님은 고별사에서 신앙인들이 하느님과 맺는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7,26). 이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14,21). 위의 말씀은 일종의 신비사상과 연관이 있다. “나타내 보인다”는 표현은 대단히 의미 있는 표현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아는 영혼은 복되다. 그 앎은 너무나 좋으신 하느님을 “바라봄”이라는 관상적(觀想的) 상태나 그 상태가 너무 좋아 세상에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고 “이곳에 장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에게,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아에게”라고 소리 지른 사도 성 베드로의 심정이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기도의 여섯 단계에서 맛 본 그 탈혼적 상태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여러 가지 신비를 알게 하신다. 사실 영성신학에서는 사도 성 요한을 신비가로 본다. 그의 표현에서 신비적인 의미를 풍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며(참조.14,23;17,20-23;15,11;1요한 3,2;4,16) 다른 어느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분이라(참조.13,23;19,26;21,7;21,20) 그분을 사랑으로 알고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성인이신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을 두고 “사랑은 뛴다. 만난다. 그리고 기뻐한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걸어가지 않고 뛰어간다. 사도 성 요한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주님의 무덤을 향하여 힘껏 달렸고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도 제일 먼저 목격하였다(20,4;21,7). 왜냐하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무덤을 향하여 뛰어갔고 그분을 보는 눈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열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들도 이론보다는 마음으로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5,1-17)라는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5/ 믿음

믿음과 불신은 상호 대립된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6,44-45;참조. 8,43-45;12,39-41). 예수님은 징표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믿게 하셨으나 마음이 굳어져서 죄의 상태에 있던 사람들은 끝까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로서(참조. 9,39-41) 근본적으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8,39-47). 지도급의 유다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군중들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불신자들 중에는 그분의 제자들(6,60-65)과 심지어는 그분의 형제들도 끼어 있었다(7,5). 그러나 베드로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6,68-69). 믿음은 지식(앎)으로 이끌고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파견을 받아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셨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6,40)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11,40).


        6/ 예정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신 아드님은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이시다. 즉 아버지는 영원으로부터 아들을 아시고 그를 사랑하시며, 또한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당신을 믿는 이들을 아들에게 “주신다? 요한 복음에서 “준다”는 동사는 예수님에게 위임된 인간의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과 연관하여 여러 번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과 연관된 것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아드님에게 주어진 것이다(3,35;13,3).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6,37-38). 예정은 신비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 갈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오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6,44.참조.6,65).

        7/ 세상

사도 성 요한이 말하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이 세상은 확실히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세상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을 때는 심판과 단죄의 대상이 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파견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상을 판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3,17;12,47). 그분은 세상의 구세주(4,42)이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6,33. 51)과 세상의 빛(8,12)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9,39)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심판을 받았으며(12,3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쫓겨남으로써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15,19).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분의 다음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다”(15,19). 사도 성 용한은 그의 서간에서 세상이 악으로 차 있음을 전제하면서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그러므로 이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1요한 5,19)라고 하신 것이다.


        8/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요한 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 개념이다. 그 빛이 어둠에 반대되는 이원론은 아마도 복음사가가 그 시대의 헬레니즘에 침투된 영지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유다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기초에 뿌리를 둔 사상이다. 빛은 하느님의 성질을 나타내는데 비해 어둠은 하느님의 구원과 요구에 대한 무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죄의 원인이다(욥기 18,5-6;24,13-17;로마 13,12;에페 5,8 등). 사막의 수도공동체였던 쿰란에서 발굴된 문헌 중의 한 제목은 요한 복음의 이 주제와 비슷한 “어둠의 아들들을 대항한 빛의 아들들의 전쟁”이다. 이것은 다음 번의 소제목에 나오는 생명과 죽음의 대립 개념과 같은 것이다. 빛나고 생명을 주는 로고스(그 말씀)가 세상에 들어올 때 어두움은 힘을 잃고 비실비실 물러가 버렸다. 세상을 자기의 예속 하에 두고 통치하던 그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1,5).“나는 세상의 빛이다”(9,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빛 안에 걷는 자”이다. 이는 “사랑 안에 사는 것”이고 “진리를 따르는 것”(3,21)이며 “세상의 빛”(9,5)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신”(11,25) 그분 안에 사는 것이다. 반면 “어둠 속에서 걷는 자”는 “불신”과 “악의 길”에 들어 서 있으며 “반그리스도적”으로서((3,19) 진리를 저버리는 악마의 자식(8,43)에 속한다. 이런 자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참된 것을 보지 못하며 탐욕과 자기과시와 만족에 빠져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슷해진다(9,40-41). 지도자가 어둠으로 차 있을 때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 되어 버린다(10,11-12). 

  

        9/ 새로 태어남

예수님과 니꼬데모가 나눈 대화에서 생명은 “위로부터 태어남”(3,1-13)이며 이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에 의한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세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세례는 물에 잠기고 씻음으로써 과거의 생활을 씻어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영이 풍성하게 임하신다(이사 44,3;59,21;즈가 12,1;요엘 3,1). 영이 풍성하게 임하시고 넘쳐흐르면 사람에게 참된 내적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 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그래서 나의 규정을 다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들겠다. 그제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 19-20).

천상 실체인 성령을 통하여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관계 안에서 지상의 실체인 물을 사용하여 새롭게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야곱의 우물에서 성령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흘러 들어갈 생명을 더 깊이 설명하고 있으며 베짜다 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준 치유사화(5,1-9)에 이어 구원을 목말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샘솟는 물을 강물처럼 흘러나게 하시는(7,38-39) 주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원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10/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6장에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는 선언을 하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빵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6,54)라고 하셨다.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빵과 음료로 선언하신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이를 재확인하셨다. 교회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성체로 믿고 거행하며 제일 큰 성사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를 거행하는 전례는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예수님 자신이 먹히는 빵이라는 선언은 참으로 신비이며 이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분의 인격을 믿고 이를 받아들이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제자들이 그분을 떠난 사실(6,60-66)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분이 먹히는 빵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그분을 먹을 수 있는 잇점이 있는 동시에 조심하지 않으면 고린토 교회 공동체의 일부 신도들처럼 크게 잘못할 수도 있다(1고린 11,17-34). 그분을 잘 모시는 이는 그분의 힘으로 살게 됨을 우리는 믿고 살아야 할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6,57).


        1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빵의 기적에서 이미 성체성사가 예시되어 있지만 공관복음서와의 차이점은 요한 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발을 씻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정결(淨潔) 예식이 아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그분이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셨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13,12) 그분을 추종하는 이들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버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그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5). 교회는 성목요일 저녁에 사제가 발을 씻어주는 의식을 거행한다.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라 여기에는 상당히 큰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토대가 겸손과 사랑에 있음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성체는 먹힌다. 이보다 더 큰 겸손과 자기 증여(贈與)와 비하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겸손과 자기 비하와 온전히 자기를 내주는 사랑의 행위로써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진정으로 성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12/ 예수의 떠남과 성령의 강림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생수”라는 말을 쓰셨다. 성령의 상징은 물, 불, 바람이다. 특히 물은 새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7,38;참조. 이사 55,1-11). 물은 대지를 살아있게 하고 푸르게 하며 열매맺게 한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도 그러하다. 죄로 인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성령을 주시려 한다. 믿는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여 충만한 삶으로 채워 주시는 그 성령을 주시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신 다음 그 능력의 성령이 임하실 것이다.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16,7) 그러면 성령은 무엇을 하실까? 성령은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 주실 것이고...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16,8-11)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협조자(빠라끌레또스)로서 그분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참조. 14,16-17.23-24.26;16, 12-14;20,22). 마지막으로 성령은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시며 증거하신다.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제자들은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13/ 사랑의 계명

긴 고별사에서 제시된 큰 교훈은 사랑(아가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하는 마지막 당부인 유언처럼 느껴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그분은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그분고 함께 지낸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해당된다(참조.10,17-18; 13,34-35; 14,21.23.3115,4.9-10; 17,23- 24.26).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5). 사랑은 위대한 설교나 논문보다도 더 힘이 있다. 예수는 좋아도 예수쟁이들은 싫다고 하는 외교인들을 볼 때 우리 교회가 참다운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리스 철학자들은 만물의 기초를 물, 불, 공기, 흙 네 원소로 보았는데 다섯 번째 원소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서 분명히 사랑이다. 사랑의 만물의 원리인 것이다. 사랑만이 이 부조리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로 그분이 유언으로서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며 사랑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14/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길, 진리, 생명을 여러 번 말씀하신 예수님은 고별사에서 자신의 신원을 이런 식으로 밝히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 인간이 가야할 마지막 점, 그 종점은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지식이며, 그것은 영원한 행복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거기에 이를 수 없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하느님은 인간이 가려고 하는 본고향이므로 예수님은 인간이 가는 그 길이라고 하였다. 올바른 길을 통하여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행복과 완성은 그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잡이가 되신다. 예수님은 인간의 목적이자 그 곳에 이르는 유일한 길잡이이시므로 그분은 인생 여정에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과 가까운 분이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5,39)는 말씀에서도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15/ 성모 마리아

요한 복음에는 가난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이 처음 등장하신다(2,1-11)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그 기적은 표징으로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준 사건이었으나 그 내용을 깊게 묵상해보면 성모님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아직 예수님의 때(죽음과 부활을 통한 영광 받으심)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부탁으로 기적을 행하시어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 사건 이후로 성모님은 전혀 등장하지 않으시다가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 직전에 나타나신다(19,25-27). “어머니가 서 계시더라”(Mater stabat). 너무나도 처절한 아들과 어머니의 상봉! 인간의 삶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 특별히 모자(母子) 관계를 생각해 볼 때 - 어머니는 아이를 아홉 달 동안이나 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 아들의 기쁨은 어머니의 기쁨이고 아들의 고통은 어머니의 고통이다. 필설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지무지한 고통과 치욕,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 비참한 고통, 인류의 죄악을 두 어깨에 짊어지시고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아드님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신 어머님의 그 참혹한 고통, 해골산이라고 불리던 골고타의 그 사형장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죄인의 어머니가 되시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조소를 받으시고.....그래서 아드님과 함께 당하시고 또 당하시고.....그러나 고통 중에서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끝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신 성모님. 그러나 결코 실신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신 성모님. 아드님이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 되셨듯이 성모님도 바로 고통의 여인이 되셨다. 과연 시므온의 에언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효성지극한 한 마디 말씀을 하셨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이다. 걙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19,27). 스승으로부터 사랑 받던 제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스승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 이하 다른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과 제자들, 심지어는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 그 비참한 죽음 직전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제자가 함께 한 것이다. 이보다 더 극적이고 사랑의 장면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사도 성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전승은 충분히 믿을만하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부활하신  예수님게서 제일먼저 성모님을 방문하셨을 것이라는 묵상 안내(참조:영신수련 218,220,299번)도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


 (2) 첫째 서간

서간의 주요 가르침은 사랑이다. 그것은 형제적 사랑이 일상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의 참된 신학이 전게되어 있다. “빛 속에서 걷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사도 성 요한은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가르친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4,20-21).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1요한 5,1-4);4,10-12) 한 마디로 말해서 그 핵심적인 내용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1요한 4,19)이다. 그 사랑은 궁극적으로 아가페적 사랑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당한 그 사랑! 그 사랑은 고별사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1요한 1요한 3,16). 바로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1요한 4,7-9). 

사도 성 요한이 전한 복음과 서간의 가르침은 세례와 성체, 그리고 공동체 생활, 즉 형제적 사랑의 실현 안에서 드러난다. 이는 교회의 성사생활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강조한 그의 영성은 우리를 신비사상으로까지 인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적 영성은 복음 안에서 시작되어 초대 교회의 수도자들을 거쳐 중세기에서 꽃피고 열매 맺었으며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그 은혜를 받은 주님의 자녀들에 의해 불완전하게나마 지속되다가 “영원한 당신”과 함께 하는 그 나라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성 아우구스띠노처럼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는 기도는 드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누리게(frui Deo) 될 바로 그것이 만족할 줄 모르는 만족(insatiabilis satisfactio)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복된 상태를 우리는 지복직관(visio beatifica)라고 한다.

  (3) 묵시록

얼마 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난해한 묵시록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세기 말 현상과 더불어 더욱더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1/ 장차 닥쳐올 사건들

묵시록은 초대 교회 뿐 아니라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성경의 어느 내용보다도 독자들을 매혹시켜 왔다. 신비스럽고도 공포를 자아내는 표현들, 예를 들면 기병(6,2), 끝없이 깊은 지옥(9,1), 짐승의 낙인(19,20),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19,20), 천년 왕국(20,1-7), 대 바빌론(14,8),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들이 등장한다.

묵시란 그리스어 아뽀깔립시스(Apokalypsis)에서 나온 말로서 커어튼이나 뚜껑 안에 감추어 둔 어떤 것, 즉 “씌우개를 벗긴다” “비밀을 폭로한다” “숨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성서 문헌학적으로 사용할 때는 장차 올 하늘 나라의 비밀을 환상과 상징으로 묘사한 문서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 묵시록이다. 유대 말기와 초기 그리스도교 사이에 고도로 발달했던 묵시문학은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사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특수한 종말론적 세계관을 전개시켰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볼 때 종말론적 사상을 특수한 문학 형식으로 발표한 것인데 세말에 일어날 사건들과 역사의 종말을 환상적으로 묘사한 특징이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 묵시록은 죽음, 공포, 파괴, 세상 종말 등을 알리는 듯하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참 희망을 준다.


        2/ 묵시록의 저자

저자는 자신을 단순히 요한이라고만 한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것을 그대로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묵시록의 저자를 사도 성 요한으로 보아 왔으며 로마 황제 도미씨아노(Domitianus) 재위(기원 후 81-96년) 당시에 기록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님, 주님, 구세주로 증언하였다고 하여 그리스에 속한 파트모스(Patmos) 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파트모스는 에페소의 남쪽 90km, 에게해(Aegean Sea)의 소포라데스(Soporades)에 속하는 작은 섬인데, 로마시대에는 정치범들을 유배보내는 귀양지였다. 섬의 남부에는 위대한 성인 크리스토둘로스(Christodoulos)가 세운 성 요한 수도원이 있다.

사도 성 요한은 정치범이 되어 갇혀 있을 때 미래에 관하여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나는 주님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 뒤에서 울려오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묵시 1,10).

이 “주님의 날”(kyriake hemera)이란 무엇인가? 헤브레아어로 된 성서에는 에언의 말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주님의 날에 일어날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주님의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아, 몸서리쳐지는 야훼의 날이 온다. ‘격분과 분노가 치밀어 나는 땅을 잿더미로 만들고 죄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13,9). 그 날은 공포 분위기의 시간이며 하늘이 놀라는 날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별들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떠도 침침하고 달 또한 발게 비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악한 세상을 벌하고 악인들의 죄악을 벌할 것이기”(13, 10-11절)때문이다. 

주님의 날은 하느님께서 인간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시간이다. 구세주의 두번째 내림이 심판과 진노를 동반한다면 아마도 주님의 날에 오지 않을까? 묵시록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영화 필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그 필름을 계시를 통하여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비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대필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체험과 감정 그리고 그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계시 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이다.

묵시록의 사건들은 어느 시대의 어느 독자에게도 실재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하느님과 연결시킬 때 사건 하나 하나가 생생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묵시록의 내용들은 화급을 다투는 긴박함을 알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긴박함이란 “하느님께서 곧 일어날 일들을 당신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에게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당신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려 주셨기?1, 1)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성 요한은 이 묵시록을 읽고 그대로 따르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내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일들이 성취될 시각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1, 3). 천사가 요한에게 또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묵시 10, 6).  묵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은 저자가 마치 목격증인으로 그런 사건들을 본 것처럼 표현하고 있어 더더욱 실감을 자아내고 있다. 몇몇 특징 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무녀졌다. 큰 바빌론 도성이 무너졌다!”(14, 8); “그들이 주님의 분노를 샀으며 때는 와서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고,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대소를 막론하고 주님을 공경하는 자들은 상을 받고 땅을 어지럽히던 자들은 망하게 되었습니다”(11, 18);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악마가 크게 노하여 너희에게 내려갔다”(12, 12); “그분의 심판의 때가 왔다?14, 7)  


        3/ 위압적 메시지

묵시록의 마지막 장은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화급한 말씀, 즉 위압적인 메시지를 읽게된다. 그분은 독자에게 묵시록에 수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미리 일어날 것임을 상기시키시면서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예언자들에게 염감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당산의 종들에게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다”(22, 6)라고 하신다. 또한 “그 때가 가까왔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22, 10)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22, 12)라고도 하시며 거듭 강조하여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22, 20).

그러므로 윤리적인 긴박성이 묵시록의 주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지나간다. 메시아 나라가 도래할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진노의 시기도 화급하게 닥쳐오고 있다. 온갖 환난이 모든 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은 진리를 따라 살 때 올바로 살아가며 구원을 받는다. 이승에서 안전한 항구를 찾는 일과 저승에서 구원을 얻는 방법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묵시 3, 10-11).

묵시록에 심취된 독자들은 계시의 내용을 결코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묵시록은 계시들로 꽉 차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사건들이 전개되며 해석에 따라 각 사건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 다음의 성서 구절은 역사적인 사건의 한 예에 불과하다.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그 짐승의 비밀을 말해 주마...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언덕이며 또 일곱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중의 다섯은 이미 넘어졌고 여섯째는 아직 살아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마지막 왕이 나타나더라도 잠시 동안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묵시 17, 7, 9-10).  

묵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17장 10절의 경우에는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특별한 식별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1)다섯 왕은 이미 넘어졌다.  2)여섯째 왕은 아직 살아 있다.  3)마지막 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인 인물들의 언급은 시대 상황과 식별을 요구한다. 또한 666이란 숫자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가? 이 또한 시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가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인 숫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묵시록은 독자들에게 위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일들이 이 땅 위에서 일어날 것이다(참조. 8,6-13). 그러므로 하느님의 보호 아래 들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든지 묵시록의 권고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것, 곧 내가 본 모든 것을 그대로 증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일들이 성취될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묵시 1, 2-3).

        4/ 희망의 책

비록 묵시록이 위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묵시록은 희망의 책이기도 하다. 특히 환난을 당하는 이들과 어린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된 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다. 우선 이들의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인류 구원을 위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의 노래를 들어보자.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갚을 치려...사람들을 구해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5, 9).

그리고 묵시록에는 상징적으로 이마에 도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 14만 4천명과 옥좌와 어린양 앞에 서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데 모두 큰 환난을 겪어낸 자들이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14만 4천명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14, 4)로서 옥좌 앞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주님을 위해 독신과 동정을 지킨 자들(사제, 수도자, 동정자)일 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환난을 당하고 희생하며 봉헌된 자들에게는 큰 상급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묵시록은 그리스도인 완덕의 모범이신 주 예수님을 충실히 따라가며 그분께 충성과 효성을 다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큰 상급이 주어지리라는 희망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위압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희망을 제시하는 이 책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지혜와 신앙인의 올바른 식별을 요구하고 있다.


        5/ 상징의 책      

묵시록은 무엇보다도 상징의 책이다. 역사적인 사건들과 윤리적인 개념들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일들이 모두 구약성서의 전통이나 근동 신화의 영향을 받은 생생한 은유와 상징들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백마를 타고 오시는 영광스러운 왕이신 예수님(묵시 19, 11-16)은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리라는 표현이 나온다(참조.시편 2, 9).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이런 상징적인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하늘, 천둥, 번개, 우주의 대혼란, 짐승, 돌, 여러 색깔과 3, 3년 반, 7, 12, 666, 14만 4천 등 숫자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각 상징이 무엇을 묘사하는지 또는 어떤 상징적인 사건들이 언제 실제로 일어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상징들의 의미는 역사의 진행 자체가 그것들을 명확하게 드러낼 때까지 감추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묵시록은 신약성서 안에서 유일하게도 특이한 책이다. 다른 책들은 주 예수님의 행적과 그 당시 교회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거나 서신 등으로 되어 있으나 묵시록만은 성격이 다르다. 시현(示現)은 묵시록 안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묵시록을 본질적으로 미래사에 관한 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6/ 묵시록에서 드러나는 대조         

묵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다른 열쇠는 비교와 대조이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사탄의 능력 또는 군대는 언제나 하느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 세상이 마치 가공할 원수인 사탄이 하느님께 대항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내림하셔서 1천년 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천년왕국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대조는 두 가지 다른 삶의 양식이다. 즉 두 개의 다른 집단이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창녀로 묘사되는 집단은 영적으로 사악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 악령에 지배를 받아 속임수에 빠져 살아가는 삶의 형태이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사악한 정치 권력과 결탁되어 있어 이 세상의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리나 종국에는 멸망하고 만다. 또 다른 집단은 어린양을 추종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新婦)로 불리고 있다.  

또 다른 대조는 온 세상을 악으로 몰아가며 부패한 체제를 만들어 내는 대바빌론과 하느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다. 대바빌론은 온갖 악행으로 가득차 있으나 새 예루살렘은 온갖 좋은 것과 완덕으로 충만한 도시로서 그 곳은 미래에 하느님의 왕국이 통치할 사령부처럼 묘사되고 있다.

또한 묵시록은 이야기로 넘쳐흐르는 책이다. 이것 또한 묵시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묵시록은 인간의 역사를 두루 통하며 마지막에는 위험스러운 세대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마지막 때가 오면 온 세상은 사탄의 활동으로 충만해진다. 그러나 메시아의 도래로 사탄의 세력은 힘을 잃고 정복당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묵시록은 길흉이 교차되는 소식들을 전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선과 정의가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묵시록을 읽어나가면 여러 가지 불길하고 가공할 사건들이 독자들에게 두려움을 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인간사에 개입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며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악과 타협하지도 않으시거니와 언제나 악을 이기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전능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품 안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하느님만이 안전한 항구이다. 창녀나 대바빌론, 즉 하느님을 떠난 세속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멸망한다. 살아남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전적인 회심과 기도, 의탁과 신뢰로써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7/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메시지

묵시록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들의 서간들이 전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 한 마디로 신약성서는 주 예수님의 업적과 그리스도인 신앙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종들(묵시 1, 1)로 불리는 그분의 백성에게 주어진 메시지이다.

묵시록은 구체적으로 일곱 도시 안에 있던 하느님의 일곱 교회에 보내져 읽도록 되어 있다.  사도 성 요한은 시현(示現 visio)을 통해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그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여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어라.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1,11.20).

각 메시지는 예언적 소명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예언적 소명은 “가라 그리고 누구에게 말하라. 이런 식으로 누가 말한다”라는 기본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도 성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어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묵시록은 “가라”는 명령 대신에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명령자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시다. 각 메시지의 주요한 표현은 “나는... 알고 있다”이다. 이 부분은 권고로 되어 있고 유배 이후 유대아 구원 재판(salvation-judgment)

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1)찬미, (2)책망, (3)회개에로의 초대, (4)심판의 협박, (5)구원의 약속 등을 포함하고 있다. 각 메시지는 두 가지 다른 말씀으로 끝맺고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와 무엇을 “주겠다” 또는 “하겠다”는 약속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페소 교회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는 약속이 주어졌고 스미르나 교회에는 “생명의 월계관을 씌워 주겠다”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식적인 문구는 그 기능에 있어서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예언적 선포 문구와 비슷하며(참고. 1열왕 22,1). 다른 하나는 승리자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약속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아시아는 오늘날 터어키 서부로서 그 당시는 그리스말을 쓰는 로마의 속주(屬州, Asia Proconsularis)였다. 그곳은 소아시아 서쪽을 지나 바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서 기원 전 133년 뻬르가모(Pergamos)의 최후의 왕 아탈루스 3세(Attalous III)의 종전(從前)의 영역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소아시아의 서부 연안 지대를 차지하는 무시아, 루디아, 갈리아의 여러 지방과 브루기아의 내륙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도 성 요한이 언급한 그 일곱 도시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흩어져 살고 있었고 교회도 일곱이나 있었다. 묵시록은 바로 이 일곱 교회에 필요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각 교회가 안고 있던 영적인 상태와 부족한 면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각 교회가 행한 영적인 업적과 안고 있던 문제, 환란, 희망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8/ 일곱 교회

일곱 교회는 위에서 언급된 구체적인 교회들과 역사 안에 존재할 하느님의 교회들을 대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도 성 요한을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와 연관을 맺어야 하며 교회를 통해 일어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사도 2장)을 통해 시작된 교회는 주님이 재림(parousia)하시는 날까지 꾸준히 그분의 길을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사도 성 요한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이다. 각 교회는 서로 상이한 장점들과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이 또한 우리가 일곱 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주제들이다. 현실적으로 각 지역 교회도 일곱 교회처럼 장점과 단점들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묵시록은 마지막 날의 관점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록의 2-3장에서 제시된 장점들과 문제들은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이 세상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언제나 참조해야 할 내용들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묵시록에서 열거된 다음의 사람들을 만났으며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에페소 교회(2,1-7)

이 교회는 신앙의 정신으로 수고하고 인내하였으며 가짜 사도들을 가려내었다. 초대 교회에는 어느 시대보다도 성령의 은사가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순회하면서 은사를 사용하던 지도급 인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 부활하신 주님과 대면한 후 직접 그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자들이었다(참조. 마태 10,41;1고린9,1-7;디다케 11-13).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가짜 지도자로 판명되어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참조. 2고린 11,12-15). 심지어는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척받을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다른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는 이들도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다(참조. 마태 7,21-23). 성령의 은사 사용과 윤리생활이 일치되면 금상첨화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성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가끔 체험한다.

그 당시 사도의 진위(眞僞)를 가려내는 기준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를 참조할 수 있다. 디다케의 제 3부 교회 규범(11-15장)에 의하면, 떠돌이 사도들은 돈을 요구하거나 한 곳에서 사흘 이상 머물며 생활 태도가 좋지 않은 자들이다. 물론 이 규범이 100년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집필한 것이므로 그 당시 교회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참고할 수는 있다. 에페소 교회가 진짜 사도들과 가짜 사도들을 구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그 교회의 장점이라 하겠다.

이 교회가 지닌 또 다른 장점은 니골라오파의 소행을 미워하여 그 당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점이다. 니꼴라오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 두가지만 소개하면 이러하다. 고전적 해석에 의하면,  이 파의 주창자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니꼴라우스(Nikolaus)이다. 그들은 에페소와 뻬르가모 교회 안에 드러난 이단의 한 파(묵시 2, 6.15)이며 예루살렘 사도회의(사도 15장)에서 결정된 우상에게 드린 예물과 음행을 피해야 하는 데도 그 규정을 지키지 않고 그런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 이레네오의 반이단론(Adv. Haeres. I.26.3;III.11.1)에 의하면 니꼴라우스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부제 중의 하나였다(사도 6, 5). 또한 히뽈리뚜스(Hippolytus)의 철학논문집(Philosophoumena VI. 36)에서도 그 주창자를 이레네오 성인과 같이 본 듯하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Clemens Alexandrianus Titus Flavius)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니꼴라오 자신은 실제로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는데 그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의 사상을 잘못 가르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였으며(Strom. II.20) 교회사가 에우세비오도 자신이 쓴 교회사에서 끌레멘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Hist. III. 29). 이런 상이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세기 경 영지주의와 결탁된 듯하며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 성서학자들은 니꼴라우스란 이름을 단지 은유적이며 “백성의 정복자”라는 의미로 보고 있다.

이런 좋은 점들을 지녔던 에페소 교회도 잘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교회 구성원들이 하느님께 대해 처음에 지녔던 사랑과 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과 열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성취해 나갈 때 열성을 가진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하느님을 알게 된 어느 외교인이 열심히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다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열성이 식어지는 경우가 있다. 비단 이런 신자들 뿐 아니라 구교우들과 소위 열심하다는 신자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잦은 성찰과 반성,  피정이나 연수, 고해성사를 통해 주님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변화된 삶만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다. 묵시록은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만일 그렇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너의 등경을 치워 버리겠다”(2, 5). 그러므로 진심으로 회심하여 주님께 가졌던 열성과 사랑을 다시 찾아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교회는 성모신심 열기로 가득 차 있다. 현 교황님의 열성과 콜베 신부님의 시성 그리고 스테파노 곱비 신부님의 활동 등으로 인해 공의회 이후에 다소 식었던 것처럼 보인 성모신심이 되살아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성모신심 세미나와 성모 발현지 순례 등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이 신심을 깨우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바람직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많이 바치며 성모님의 발현지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신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에서 나온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모두 기도와 회개로 낙착된다. 성서의 가르침과 성모님의 메시지가 일치하는 것도 참으로 신기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기도와 회개만이 살 길이 아니겠는가?


 스미르나 교회(2, 8-11)

이 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다. 그들은 유대아 전쟁(66-74년)으로 인해 갈릴래아나 유대아로부터 이민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가난하였다. 이 교회의 신도들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악령의 무리에게 비방도 당하였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을 받아 그들 중 몇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악령은 중상하는 자로서 사탄과 동일한 인물이며 반대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사도 성 요한의 추종자들을 반대하는 자들 배후에 있는 악령들의 두목으로서 마지막 세력이자 조종자이다. 그는 악과 죄로서 일시적으로 승리할 것이나 그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모범이신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므로 그분께 충성을 다하면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월계관을 받는다. 어둠의 세력이 거두고 있는 현재의 승리, 하느님께 대한 고집스러운 배척, 하느님 사랑의 법에 대한 반역, 불신앙으로 거두는 승리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충성심이다. 忠은 마음이 한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언제나 주님께만 마음을 두는 자는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이다. 주님을 따르고 섬기되 충성을 다해 따르고 섬긴다. 이런 자는 확실히 생명의 월계관을 받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던 위에서 언급된 영성적인 조건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뻬르가모 교회(2, 12-17)

이 교회의 신도들은 지방 관리들을 이용하여 자행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강건한 믿음을 보인 충성스러운 성도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탄의 왕좌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뻬르가모 성채 위의 제우스에게 봉헌된 제단이나 로마와 아우구스뚜스에게 봉헌된 성전 또는 로마 통치자의 좌석을 의미할 수 있다. 주님의 진실한 증인이었던 안띠빠스가 처형된 것은 사탄의 왕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스미르나 교회에서 본 것처럼 사탄이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지방 관리들이나 박해를 가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왕좌란 로마 지방 장관의 재판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사도 성 요한의 시대에 뻬르가모는 비록 중심 도시는 아니었으나 지방장관은 그 곳에서 정기적으로 재판을 하여 판결을 내렸다. 그는 칼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지신 분”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하여 참수형을 내린 로마의 지방장관과 대조를 이룬다. 그분은 나중에 그들을 벌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들어 높히실 것이다. 따라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높은 좌석에 앉아 심판할 권한을 받게 된다(참조. 묵시 20, 4). 

순교할만한 강건한 믿음을 가진 뻬르가모 교회의 신도들도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 중 어떤 이들이 니골라오파의 가르침을 쫓아 이스라엘 자손을 죄짓게 한 발람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이다. 발람의 가르침은 민수기 22-24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하여 이스라엘 후손들을 죄짓게 한 사악한 무리였다.  발람과 발락은 이스라엘인들을 충돌질하여 모압인들과 혼인을 하게 하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민수 31,16).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게 한 이들이 뻬르가모의 신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충돌질 한 듯하다(참조. 1고린 8-10장). 전체적인 흐름은 이런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서 그리스-로마 또는 아시아계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사서 먹지 않았는가?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신자들과 함께 저녁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만찬에 나온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다음에 손님들에게 제공된 것이었을 유념할 것)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인 성전에서 자리를 함께 하거나 그들과 더불어 이교 신들에게 찬미를 드릴 수 있었는가? 문제의 핵심은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타협이나 동화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숫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거절하고 수용하느냐가 그 교회의 일부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그런 갈등 속에 어느 정도 우상숭배가 그 교회 안에 침투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지신 분은 타협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마태 10,34). 부활하신 그분을 근본적으로 추종하며 모방하기(sequela et imitatio)를 원하는 자는 오로지 그분께만 충성을 바칠 뿐이다.

또 이 교회의 일부 신도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성적인 타락이었다. 성적인 타락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노여움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한편 성적인 타락은 자의적인 해석보다는 우상숭배로 볼 수도 있다(참조. 14,8;17,2.4.;18,3.9;19,2). 묵시록에서는 단 한 곳에만 자의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또한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19,20). 사도 성 바울로는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는 범주에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를 같이 놓고 이를 행하는 자를 사악한 자라고 칭하였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을 탐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고린 6, 9-10).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 이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빠진 죄악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회개를 요구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주님의 쌍날칼에 희생될 것이다.

  띠아디라 교회(2, 18-29)

띠아디라는 소아시아의 뻬르가모와 동남쪽 사르디스 사이에 있던 도시로서 사도행전 16,14에 나오는 옷감 장수 리디아라는 여신도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터어키 성읍 아키사르이며 비옥한 평원에 위치하고 있어 뻬르가모와 간선 도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시리아왕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세워져 뻬르가모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의 평화 시대에는 중요한 통상로를 이용하여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도시는 은세공, 피혁 가공, 염색, 아마포 등의 업자들이 동업 조합을 조직하여 뛰어난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이 동업조합의 회합이 신전에서 이루어진 데 있었던 같다. 그 조합에 가입된 신도들도 자연스럽게 이교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엄밀하게는 부도덕한 관습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성서 본문에 따르면 이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것은 악녀이자 탕녀인 이세벨이라는 여성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그 공동체에서 사도 성 요한의 가르침을 방해하는 인물로서 두 사람 사이에는 예형론적 관계가 드러나 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혼인한 시돈 임금의 딸(1열왕 16,31)로서 가나안 여인이며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바알 숭배를 지지하였다. 그녀는 그 교회의 일부 신도들을 미혹시켜 성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게 하였다. 그녀의 가르침은 발람의 가르침(묵시 2,14)과 비슷한 것으로서 “사탄의 비밀”을 일부 신도들에게 전수하였다. 사탄의 비밀이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으나, 성서 본문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과 성적인 죄악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사탄의 비밀은 신비술(神秘術 occultism)로 볼 수도 있다. 신비술은 일반적으로 사이비과학이나 초자연적인 힘과 존재에 대한 믿음, 지식 또는 관행을 포함한 광범위한 이론과 실천의 체계를 말하는데, 마술(魔術), 투시력(透視力), 신지학(神知學), 강신술(降神術)의 형태로 나타나 비밀스런 신비들이나 자연의 힘에 대한 지식이나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탄의 비밀을 전수 받았다는 것은 악령들을 부르는 제문을 통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하느님은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문제는 그들이 마음을 고치지 않은 데 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거절한 그들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종하지 않고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는 승리자가 될 것인데, 그런 자는 여러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시편(2,8-9)을 참조할 수 있으며 “샛별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받을 영광과 불사불멸을 의미한다고 하겠다(참조. 다니12,3;마태 13,43;1고린 15,40-44). 띠아디라 교회에 하신 말씀은 비단 그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천주강생 2천년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성 요한은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3,1-6)

사르디스는 기원전 12세기 경에 이룩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의 하나로서 옛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므로 군사상으로나 상업상으로 발전된 도시였다. 이 도시의 성체는 보통 공격에 의해서는 힘겨운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었으나 방비를 게을리하여 두 차례(기원전 549년과 218년)나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치솟아 있는 암벽 틈으로 침입한 군인들에 의해 그 요새가 함락되었던 것이다. “네가 깨어있지 않으면 도둑처럼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라는 경고는 바로 이 배경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이 곳에는 키벨레(Cybele)여신의 밀교(密敎)가 성행하였으므로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사람”이란 표현이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한편 이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지진으로 인해 파멸되었으나 재흥 되어 기원 후 3세기 경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기원 후 1세기경에는 모직업과 염색업이 성행하여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그 시민들은 사치와  쾌락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윤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위에서 언급된 밀교의 영향과 사치와 쾌락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이 교회의 신도들은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신앙의 기력을 잃고 일어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그러면 그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참조. 1,4.16.20;토비 12,15)을 가지신 그분”이 아시는 그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이교 희생제사는 그 지방의 관습이었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 신앙인도 깨어있지 않으면 지난 날의 습관과 세상의 체면을 무시하지 못하고 세례성사 때 끊어버린 악습을 재현하는 경우가 있다. 사르디스 교회는 말씀과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교신 숭배는 기복신앙과도 연관이 있다. 기복신앙은 어느 시대나 문제이다. 히뽀의 주교 성 아우구스구띠노 같은 분도 일부 신자들이 기복적인 신앙에 빠져 올바른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그들이 올바른 인생관을 찾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부나 병의 치유 또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신전에 가서 빌곤 하였다. 성인은 시편상해에서 이렇게 한탄하였다:“많은 그리스도인 뱃사공들은 불안감을 없애기 위하여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us)에게 빌지 않고는 배를 타지 않는구나. 그들은 만사가 순조로우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지만 무슨 불상사가 생기거나 화급한 일을 당하면 점장이나 마술사에게 가버리는 구나?

또한 사치와 쾌락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시킨다. 그리하여 사물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양심은 무디어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신앙인이라도 사치와 쾌락에 빠지면 유명무실한 신앙인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런 신앙 상태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주님의 질책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은총 지위를 상실한 신앙인! 신앙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신앙인은 죽은 사람이다. 영적인 죽음에서 그는 “깨어나야”한다. 과감하게 일어서야 한다. 영적인 죽음, 즉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 은총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영혼을 아름답게 꾸며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이란 영적 체험기에서 영혼의 탁월함과 고귀함을 묵상한 후 아름다운 영혼을 “마치 금강석이나 맑디맑은 수정”처럼 표현하였다. 성녀는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돌보지 않거나 더 완전하게 가꾸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보고 한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품위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죄를 범한 영혼은 추하게 된다. 이들은 영적으로 가련하고 미련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루 빨리 그 영적 무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비유로 이런 사람들을 “그 몹쓸 뱀들과 독사와 독충들이 우굴거리는 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지극히 비참하고 추악한 대죄의 상태를 안다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을 받아들일 때 열렬했던 그 상태로 다시 돌아가 꺼져가는 심지를 아주 꺼버리지 말고 기름을 붓고 심지를 돋구어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복돋아 주어라.”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의 신도들에게도 주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회개는 변화된 삶의 시작이다. 회개의 행위는 영적으로 깨어있음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은 도둑처럼 오실 것이다. 도둑은 종말에 대한 일반적인 위기를 말할 때 쓰늠 말이다. 이어서 주님은 다시 한 번 띠아디라 교회의 일부 신도들이 빠졌던 이세벨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범한 죄악을 들추어내면서 그런 죄에 빠지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칭찬하신다.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될만한 이들이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거닐 것이다.


6) 사도 성 야고보

신약성경 안에 특별히 영적인 훈계를 담고 있는 문헌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사도 성 야고보의 서간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역할을 한 알페오의 아들이며 주님의 형제로 불린 그 야고보이다. 이 서간은 너무나 유다교적이며 윤리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르틴 루터는 이 서간을 “지푸라기 서간”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일부 성서 주석가들은 이를 사도 성 바오로와 반대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특히 두 사도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는데, 한 편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선호하는 인상을 주고 있고(로마 4장) 다른 한 편은 선행을 통한 구원을 선호하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야고 4,21-26). 그러나 야고보는 선행을 통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바오로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목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서간이 유다교-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 지침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신앙과 선행

야고보 서간은 단적으로 말해서 윤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우선 신앙에 바탕을 두고 신앙인에 어울리는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이다. 주님께서도 이를 분명히 하셨지만(참조. 마태 7,15-23) 야고보 서간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2,14-26)

여기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고 본다. 믿음에 실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되다.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만 정립하여 거기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고 믿음이 실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런 유의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신앙에 상응하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시체와 같으므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이 이상적이다.

지난 해 우리 가톨릭과 루터교의 일치에 4백년 이상 장애물이 되어 왔던 의화논쟁이 해결되어 일치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는데, 그 핵심이 신앙과 선행의 논쟁이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만으로(sola fide) 구원된다”는 루터교의 주장이 “의화는 신앙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선행은 참된 신앙의 핵심적인 표지이다”라고 절충된 것이다.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분명히 신앙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 모두 부족한 존재이고 어떤 면에서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은총의 도움으로 선행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 그러므로 선행은 참된 신앙의 핵심적인 표지일 수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선행의 구체적인 내용을 몇 가지 제시하는데, 악의 불씨인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고 세상을 친구로 삼지 말며 서로 헐뜯지 말고 탐욕을 버리라고 경고한다.


        1/ 혀는 악의 불씨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2). 인체의 작은 부분인 혀는 입을 통해서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비유, 즉 재갈과 배를 예로 든다. 말에 재갈을 물리는 비유는 그리스, 로마, 유다 문학에도 빈번이 등장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크디큰 배라도 아주 작은 키 하나로 조종됩니다. 그래서 키잡이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배를 마음대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3,4). 혀가 비록 인체에서 작다고는 하나 그 역할은 대단하다. 혀를 잘 조종하는 사람은 인격자이다. 이런 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 나올 수 있겠습니까?”(3,12)라는 말씀처럼 인격자는 한 가지 일을 놓고 진실과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그것은)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입니다”(3,14-15).     “들에 깐 콩깍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와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긴 기린 그림인가 안 긴 기린 그림인가”를 빨리 정확하게 발음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발음하기도 힘들지 않고 말하기도 너무 쉬운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잘 하는 사람은 인격자이자 덕이 있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도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마태 5,37)라고 하셨다.

남을 헐뜯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잡아떼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 등은 모두 혀를 잘못 놀리는 것이다. 혀를 함부로 놀리면 악의 불씨가 된다.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가 하면 지도급의 인물들이 거짓말을 함부로 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되어 있어 사도 성 야고보의 말씀이 어느 때보다 새롭게 들려온다. 그분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3,16). 그러므로 이기적인 야심을 버리고 진실만 말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 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이다(5,12).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권이 개입되면 소송을 제기하지만 소송을 제기할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 젊잖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상종을 안 하거나 무시해 버린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므로 참된 것을 말하며 자신의 이익이나 권위를 위하여 속이지 않는다. 그는 늘 주님의 정신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간다. 반면 속임수는 주님의 정신이 아니라 거짓말의 아비인 악령의 짓이다. 거기에는 신의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지도자의 말을 듣거나 따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공자가 자공과 나눈 대화가 군주론에 나와 있는데, 그 대화를 종합해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임을 알 수 있다. 군주가 병기와 식량을 버리더라도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할 것은 신뢰이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신뢰라는 의미일 것이다. 백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비록 그가 기능적으로 직책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백성의 마음은 그로부터 떠나고 만다. 백성의 마음이 떠나면 자신은 괴롭다. 이와 같이 거짓말은 무서운 것이다. 거짓말은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는 죄악이다


        2/ 세상의 친구는 하느님의 원수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세속(世俗)이다.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는 세속이 된다. 세속이 좋아하는 것은 교만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악령의 정신으로 차 있어 하느님께 복종하지 못한다. 지나친 욕심은 싸움과 시기와 분쟁을 자아내고 심해지면 살인까지 하게 된다(4,1-2). 하느님을 멀리하고 세속과 짝하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되는 것이다.


        3/ 서로 헐뜯지 말라

지나친 욕심에서 생기는 죄는 악담이다. 이 죄는 형제애와 정반대 된다. 악담의 성경 원문(카타랄레인)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명예를 헐뜯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말로서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사랑을 파괴한다. 모함, 험담, 거짓 증언 등을 피하라는 십계명 중 제 8계명이 여기에 속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자는 사랑을 거슬러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율법 자체에 상처를 입힌다고 꾸짖는다(4,11-12).


        4/ 탐욕을 버려라.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1,15). 실제로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과 죄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악의 근원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욕(邪慾)임을 알게 된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1,14). 마음이 유혹의 대상을 받아들인다면 죄를 잉태한다. 만일 그 죄나 기회를 피하지 않는다면 더 깊게 빠진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악의 직접적인 원인을 사람 자신에 두고 사람의 책임을 주장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성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2) 인내와 기도

“인내력을 힘껏 발휘하십시오”(1,4). 시련을 끈기 있게 잘 참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궁핍으로 생활고를 느끼고 있었으며 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오는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도들에게 인내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그 권고는 그 당시 신도들에게만 한정된 가르침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유익한 말씀이다. 구약의 욥이 온갖 고통을 당했더라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더 많은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인내를 다하여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해야 하는 것”이다(5,8). “여러분은 욥이 끈기 있게 참아낸 이야기를 들었고 주님께서 지어 주신 결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연민과 자비는 참으로 풍성합니다”(5,11).

인내를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이다. 기쁠 때 주님을 찬미하고 앓는 사람은 교회의 원로를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죄를 범한 경우에는 뉘우침의 기도를 하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비를 주시도록 전능하신 하느님께 도우심을 청하고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또한 진리의 길을 떠나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야한다(5,13-20).


 (3) 부자에 대한 경고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1,10). 부(富)를 잘못 사용하면 영성생활에는 해가 된다. 부자들은 하느님보다 자신들의 소유물에 더 위안을 두고 든든하게 살아가므로 재물은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자들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재산은 “녹슬고” 더구나 모은 재산이 착취한 것이라면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더구나 착취한 재산으로 “사치와 쾌락을 누린다면” “도살당할 날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회개하여 변화된 마음으로 불쌍한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는”(1,27) 자선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4) 온갖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우리에게 욕심이 있고 그래서 유혹이 생긴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악의 근원일 수 없다. 하느님은 변함없으신 자비를 보이신다. “온갖 훌륭한 은혜”와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로부터” 온다. 어떤 이교인들은 천체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으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는 천체의 조물주이시다. 시편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큰 빛들을 내셨다”(136,7). 빛에는 온갖 좋은 것, 즉 진리와 윤리적인 모든 선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삶의 지혜도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편견과 위선이 없고 평화롭고 젊잖고 고분고분하며 자비와 착한 행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3,17-18).


 (5) 복음에 대한 의무

        1/ 순수하게 듣는 그리스도인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1,19).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을 주로 사목하던 야고보 사도는 토론하기를 좋아하던 신자들에게 구약의 잠언집을 염두에 두고 권고한 듯하다.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귀담아 듣고 어미의 가르침을 물리치지 말아라”(1,8), 걗어리석은 사람은 부질없이 지껄이다가 망한다“(10,8),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 지각있는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린다“(10,19), ”다 듣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받기 알맞은 바보짓이다“(18,13) 등은 말이 많고 말에 실수가 많은 사람들을 훈계하는 지혜의 말씀들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 가르침을 잘 들어 학식이 더해진다”(잠언 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잘 들어야 한다. 잘 듣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목덜미가 뻣뻣하고 고집이 센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였다.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야훼께 불충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들어라, 이스라엘아(쉐마 이스라엘)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1,21).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면 덕스러운 사람이 된다. 세 번 생각하고 말하라는 성현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2/ 화를 내지 말라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1,20). 화(분노)를 두 가지 면으로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오는 무질서한 욕망을 말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 정도에 맞게 화를 내는 것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선행이 될 수도 있다. 주 예수님은 기도의 집인 성전을 더럽히던 상인들에게 화를 내셨다. 채찍으로 그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책상과 비둘기 파는 상인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는 걙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마태 21,12-13)하셨다. 이런 경우 화는 정당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이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화를 내거나 화풀이를 한다면 그런 자는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복수할 동기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겨 두시오. 실상 성경에도 ‘복수는 내 것이니 내가 갚겠노라’하고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 12,19)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언제나 사회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간다. 그 안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거나 미워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화풀이를 하거나 나의 이익만을 앞세워 화를 내는 경우들은 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복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기쁜 소식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제 얼굴의 생김새를 거울에다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비추어 보고도 물러나서는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리고 맙니다”(1,24). 건성으로 말씀을 듣거나 그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으나(마태 7,26) 야고보 사도는 거울에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한다. 기쁜 소식은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으로서 이를 지키는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1,25).

복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윤리적 가르침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혀를 억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원시교회가 권고한 사랑의 실천이었다(사도 6,1;9,39;참조. 갈라 2,10). 고아는 부모를 여이어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로서 과부와 거류하는 나그네 등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냉대 받기 쉬운 이들로서 어느 시대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과부들은 불우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천대받기 쉬운 입장이므로 하느님께서는 과부의 옹호자이시고(신명 10,18;시편 68,5;잠언 15,25;예레 49,11) 그들을 정의와 사랑으로 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출애 22,22;신명 14,29). 주 예수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마르 12,40) 원시교회는 주로 기도와 자선사업을 위한 목적으로 과부단을 조직하였으나 초창기에는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불쌍한 그들을 도와주도록 권고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세속이 주는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항하라는 가르침이다. 세속은 언제나 하느님의 정신과 반대된다. 이런 가르침을 볼 때 야고보 사도는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좋지 않은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반대하고 유다이즘의 관습을 엄격히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야훼를 섬기는 이들이 실천한 첫째가는 신앙의 의무는 사랑의 실천과 깨끗한 삶이었다.

7) 교회 공동체의 양상들


  (1) 종말론적 사고

원시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 사고에 젖어있었다. 즉 승천하신 주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는 기대 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의 출현으로 나타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라는 특성을 지닌 유다이즘 지성의 특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이었으니 그것은 종말론이라는 성서적 접근이었다. 종말론적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분은 후대 유다교에서 기대하던 인물들, 특히 메시아와 다니엘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사람의 아들과 동일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분은 또한 고통받는 종으로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분과 식사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는 형태요, 두 번째는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지던 박해와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죽음 등을 종식시킬 그분의 재림(parousia)에 대한 기대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이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변증법으로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이 완성에 대한 기대와 열렬한 기도로 나타났다. 종말론적 사상이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충실한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상급을 주실 그 “시간”을 깨어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영성은 그분을 위하여 증거하고 죽음(순교)까지도 감수하게 하였다. 그러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고통받은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사 영광스럽게 해주신 것처럼 그분께 충성을 다 바치는 이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상급이 주어질 것이리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연되었다. 주님은 언제 재림하실까?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이 오실 때까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라는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한 영성적 해답은 다음의 양상들로 제시되었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모습이 결정되었다.


  (2) 성령의 활동과 세례, 성찬과 사제 제도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신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는 분”으로 제시되었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시편 110)이시며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구속된 인류의 머리로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로마 8,29)로서 아버지께 인류를 위해 탄원과 기도를 바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hyper), 또는 우리를 대신하여(anti) 기도하는 분이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다. 특히 성찬 안에서 그분과 하나되고 그 거행에 모인 이들이 교회를 이루었다. 이는 일치와 친교를 이루시는 성령 안에 모인 이들이(이들은 세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성찬 거행을 통하여 이루어진 교회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과 세례와 성찬거행은 교회를 이루었고 자연적으로 성찬을 거행하는 사제제도가 생겨났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들은 온 지역에 두루 퍼져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종말에 함께 모이게 될 것을 미리 기대하면서 일정한 지역에 함께 모여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그 시대의 대표적 문헌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이다. 이 문헌은 100년경 시리아 지방의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편집한 교회 규범서이다. 세례에 관해서는 7장, 성찬식에 관해서는 9장과 10장에 나와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아니면 아무도 감사제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는 성찬 공동체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는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었다. 즉 성찬식 안에서 선천적 구분(나이, 인종, 성 등)과 사회적 구분(직업,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 등) 등은 성찬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사랑과 일치를 이룬 공동체는 하느님을 모두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였고 그분의 아드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고백한 바로 가톨릭(공번된) 공동체였으며 하나의 공통된 영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 공동체를 지도하고 특별히 성찬거행을 전담할 사제들이 출현하였고 제도적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 시대의 특징적 요소는 종말 사상이었다.

8) 신약성서의 영성적 결론

이상으로 우리는 신약성서의 영성적 가르침을 보아왔다. 주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사도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원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있는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 그것은 다음 세대의 교회로 아무런 무리 없이 이어졌다. 즉 공동기도와 공동 전례 거행을 통하여 중단 없이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각 지역과 문화와 시대에 맞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적용시켰을 뿐이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충실한 증인들이자 교리교사들이었다. 그 살아있는 교리교육,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정신은 교부(敎父)라고 부르는 교회의 스승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수되었고 세상 마칠 때까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교부들은 사도들과의 직접적인 역사적 연속성으로 인해 사도적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할 뿐 아니라 거룩한 생활을 통한 모범과 권위로써 신도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신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가르쳤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권에 맞는 생생한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 시대에 맞는 옷을 교회에 입혀주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꾸준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가르친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훌륭한 스승들임엔 틀림없다.


6. 초기 교부 시대의 영성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이나 교회 생활 면에 중대한 영향을 준 이들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교부들은 네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정통성을 지녀야 하고, 사도들과 시기적으로 가까운 고대성(古代性)이 있어야 하며, 생활이 모범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마지막으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교부라고 인정해온 이들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늦어도 8세기 중엽까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회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신앙의 모범을 보인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생활과 설교와 학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한 분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 교회의 구조

성찬거행을 중심으로 교회의 뼈대가 엮어지고 영성생활이 형성되어 갈 때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110년 순교)였다. 그는 뜨라야누스 황제 당시 주님을 증거하다가 붙들려 로마로 끌려가면서 여러 교회에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었다. 그는 주교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다. 주교가 사제단에 둘러싸여 부제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자들과 더불어 성찬을 거행하는 곳에 교회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고 강조하였다. 성체는 불멸의 약이자 죽음의 치료제였다. 그는 성찬 공동체를 떠나서 주교와 분리된 이는 누구나 교회로부터 분리되며 영생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곤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교계중심적 교회와 성사중심의 교회의 모습이 강력하게 등장하였다. 주교는  성찬 거행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로 이해되었고 이를 무시하는 자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분과의 관계가 깨어진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교계제도 안에서 성찬중심의 영성이 싹트게 된 것이다. 그 후 로마의 히뽈리또 주교의 저술 “사도전승”에서도 성찬과 주교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냐시오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며 이 정신은 오리게네스와 성 치쁘리아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지나칠 정도로 제도주의와 율법주의를 강조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금언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런 견해는 교회 전체가 필수적인 것으로 가정했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성찬 중심의 교회는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누릴 수 없다”라는 요한 복음의 가르침이 사도 성 바오로를 통하여 초대 교회 안에 두루 퍼져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오는 영성의 배경은 성령 안에서 이루는 일치와 친교의 공동체이다. 주교는 이 공동체의 책임자이자 머리이다. 그러므로 한 공동체에는 하나의 주교가 있어야만 했다,. 325년에 개최된 첫 번째 공의회(니체아 공의회)의 규정 8에는 한 도시에 한 명 이상의 주교를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성찬, 하나의 주교, 하나의 교회라는 원리가 확립되었다.

성찬 중심의 영성은 먹고 마시는 인간의 삶을 중시하였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제단에서 거룩해 진다는 영성이 등장하여 물질적인 것을 경시하고 배격한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를 반대하게 되었다.

                                                        

 2) 영지주의의 도전

영지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의 사고방식의 하나로서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영지(靈知, gnosis)는 지식을 의미하나 이 사상은 두 가지 면에서 교회에 도전하였다. 첫째는 그 사상이 물질 세계의 창조를 하느님이 아닌 데무르고스라는 신에게로 돌렸다는 데 있다. 이 신은 인간이 경험하는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며 이 신의 영역은 물질 안에 있다. 그러므로 물질은 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지나친 금욕주의와 모든 윤리적인 제한을 멸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두 번째로 이 사상에 물든 이들은 특권을 지닌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신적 지식이 계시된다고 보았다. 

성 이레네우스(202년 경 순교) 주교는 “죽음을 치료하는 해독제”인 성체를 강조하여 영지주의의 첫 번째 특성을 반박하였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물질 세계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역사와 시간 안에 인간사에 개입하신다. 하느님은 아담을 만드셨고 역사를 만드셨으며 온전한 자유로 행하신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배격하였다. 영적인 사람은 각자의 몸을 통해서 물질 세계를 하느님과 연관시키고 썩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는다. 이레네오 성인은 영혼의 불멸만으로 죽음을 대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후에 몸이 부활한다는 믿음을 강조하였고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이 부활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성령은 성찬식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를 유지시키신다. 몸의 부활을 고대하지 않는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그는 특권을 받은 일부 몇 사람에게 지식이 주어진다는 사상도 반박하였다. 사도들과 그 이후에 생활한 이들은 그 이전 사람들보다 탁월하게 참된 지식을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지식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이 주장을 통하여 특권을 받은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지식이 주어진다는 사상을 반박한 것이다. 이 가르침은 구원의 지식을 지적인 영역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두었기 때문에 성서적 접근과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영성, 즉 사랑과 친교의 영성으로 발전되었다.


 3)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

한편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적 영지주의도 출현하였다. 지성을 통해서 영성에 접근하며 구원을 주로 계시의 문제로 취급하려는 경향은 초대 교회의 삶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215년 사망)와 오리게네스(253년 사망)이다. 그들은 말씀(로고스)을 가지고 작업하였으며 계시를 신학과 영성의 출발점과 주요 주제로 삼았다.

끌레멘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훌륭한 스승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교리교육 학교에 가서 정착하였다. 그는 참 지식인인 동시에 안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지식이 공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강생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로고스에 대한 믿음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식은 철학으로서 거의 초자연적이고 유익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믿음은 지식보다 더 훌륭하여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보았다. 하느님을 알게 해주신 그 분이 바로 로고스로서 하느님의 이성이다. 그러므로 영성의 정수는 이 신적 로고스에 대한 관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길이다.

한편 오리게네스는 끌레멘스와는 달리 철학자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에 속한 학자였다. 그는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해석하면서 하느님의 로고스가 인간 영혼에게 참된 계시와 지식을 주시면 영적으로 완전해 진다고 보았다. 로고스와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정욕이 없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영적인 것과 물질 적인 것, 영혼과 몸 사이의 대조라는 사상으로 이를 이해하였다. 그는 금욕을 강조하여 몸의 순결과 동정(童貞)을 중시하였다. 그는 마태오 19장 12절(“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몸을 순결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성서 연구와 기도를 강조하였다. 금욕은 그에게 있어서 물질과 몸의 영향력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영혼의 해방이란 진실로 그리스 사고방식으로서 불멸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이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식한 대중과 조명을 받은 (교육을 받은 또는 영지적)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하였다. 무식한 그리스도인은 복음서에 나오는 일반 사람들로서 그들은 주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나 하늘 나라의 신비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의 비밀까지 알게된 제자들과 같은 높은 단계의 신앙인들이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서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서 외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후에는 감추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의미를 파악하는 신앙인들은 극소수로서 이들은 영혼의 정욕에서 해방되어 깨끗한 상태로 주님의 말씀에 심취하여 영성의 본질을 사는 자들로서 신앙의 뽑힌 이들(소위 엘리트 계급)이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한 오리게네스를 수도원 운동의 정신적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또한 오리게네스는 몸의 부활과 주님의 재림을 중요한 영성 주제로 제시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 안에 침투한 영지주의는 후에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하었으나 엘리트주의나 개인주의의 내지는 교회공동체와의 갈등이라는 위험을 초래하였다. 


 4) 세례의 영성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는 그리스도인 영지주의자로서 영성생활은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되는 것임을 전제하고, 그것의 출발을 세례에 두었다. 그리스도인 완성은 세례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세례는 인간을 악령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며 모든 죄를 사한다. 보다 긍정적으로는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게 하며 불멸의 인호를 주며 영혼에 주입되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실제 지식을 얻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지식(영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이 지식을 가지고 일생동안 완성(완덕)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 세례는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주님의 세례를 상기시켜주고 그분과 일치하여 악령의 유혹을 이기며 그분을 본받을 수 있게 한다고 가르쳤다.

오리게네스는 끌레멘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세례의 신심을 강조하였다. 세례 대상자는 교리 수업 과정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배운 후 사제들에 둘러싸여 세례의 신비 안으로 인도된다. 즉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학정에서 해방되어 홍해 바다를 건너 사막을 방황하면서 마지막에는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처럼 세례를 받는 이는 악령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구름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죽음을 거처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구원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분은 물 안으로 들어가서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씻겨져 새로운 찬가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악령의 모방자였던 속인이 세례를 통하여 로고스를 본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영성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능력과 그 효력을 발휘하시는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세례의 은총이다. 로고스는 마치 포도나무가 천천히 자라나 향기를 풍기는 것처럼 영혼 안에서 세례 은총의 힘으로 모든 수덕적인 행위를 하게 하여 덕을 쌓게 한다. 신앙인들은 세례의 서약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례의 은총을 유지해 나가도록 노력한다. 이제 그리스도는 영혼의 남편이 되었으므로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의 삶을 성실히 살아 덕을 닦아야 한다는 수덕사상이 등장한다. 세례에서 특별히 두 가지 주요한 신심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의 실천과 순교의 준비였다. 사랑이란 세례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이웃 사람들에게게 실천하는 것이고, 순교의 준비란 세례의 서약에 의해 순교의 기회가 오더라도 “예”라고 응답하는 신심이었다.

이 사상을 계승한 학자는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노(258년 순교) 성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속을 포기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결단으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기로 서약한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기로 노력하고, 혹시 박해가 오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례성사는 공동체 안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세례받은 이는 마치 착한 목자에게 속한 양처럼 하느님의 집에서 영예롭게 된 그 고귀한 지위를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서약을 하였으니 비록 박해를 당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서약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신심이 제기되었으니 여기서 순교에 대한 신심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성에 이르는 두 번째 태도였다.


 5) 영성의 한 형태인 순교

영지주의적 영성을 지니고 있던 오리게네스는 영성의 최고 형태는 순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레네오 성인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순교의 권면”이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제자란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진정한 영성에는 고통과 분리될 수 없는 극기를 전제해야 하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은 어떤 형태로든지 죽음까지도 예상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금욕 수행자와 순교자는 참된 영성인들로 간주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신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2세기부터 여기에 관한 설교가 교회 안에 큰 주제로 대두되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순교와 그리스도의 모방의 연관성을 이미 전제하였다. “그리스도를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참된 추종자이다.” 그분의 고통을 보면서 그분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세상이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때 나는 참된 사람이 될 것이다”(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4,2). “동전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주님의 동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동전입니다. 둘 은 표시가 다릅니다. 신앙이 없는 자는 세상의 동전을 취하고 사랑의 자극을 받은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전을 취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고통을 본받아 그분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5,2).

스미르나의 성 뽈리까르뽀의 저자는 그리스도와 그분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순교자의 유사성을 엄격히 제시한다. 이 저자는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모방자들이고 추종자들이므로 그들을 공경할 수 있다고도 한다. 177년 경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갈리아 지방의 비엔느와 리용의 공동체들은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그들을 찬양하였다. “베띠오 에빠가토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였다. 그는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따라가다가 순교로 어린양의 죽음까지도 따라 갔도다.”라고 찬양하였다.

순교자 치쁘리아노 성인은 양떼들에게 인내와 고통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을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이들은 누구나 고통 당하신 그분을 본받음으로써 그분의 동료와 동업자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순교는 완성에 이르는 가장 훌륭한 길로 제시되었다.  순교록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순교라는 점을 한결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고문을 당하고 사자의 이빨에 몸을 물어뜯길 때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감하게 죽어간 순교자들은 무아의 경지를 맛보았을 것이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순교자는 크리스토포로스(그리스도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완전한 순교에 의하여 완전하게 된다는 믿음이 두루 퍼져있었다. 치쁘리아노는 세례에 의하여 하느님과 일치되는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였으나 떨어질 때가 있지만 피 흘리는 세례인 순교를 하면 더 이상 떨어질 위험이 없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순교는 완성에 이르는 가장 훌륭한 길로 제시되었다.

이런 정신이 초대 교회에 두루 퍼져있었으므로 그 당시에 나온 서적들은 대부분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었고 교회의 설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으나 순교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데치오 황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하였는데 그들은 관리들에게 교회의 책을 갖다 바치거나 이교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5) 독신. 정결. 은수의 영성

순교의 영성이 교회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자 순교의 대용품도 등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순교를 할 수 없는 이들이 순교이 대용품으로 윤리적 완성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초창기부터 주님의 말씀에 다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쿰란 공동체로부터 삶을 배운 이들일 수도 있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을 등지고 사막과 산으로 피해가서 수도에 힘쓴 이들일 수도 있다.  오리게네스는 주님을 위하여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따라나선 이들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존경받았고 순교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치쁘리아노 성인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는 아니다. 그는 피 흘리는 순교와 피는 흘리지 않지만 순교의 삶을 산 수행자들을 구별하면서도 그들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사욕편정을 이기고 엄격한 방법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세속을 끊고 동정을 지키면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을 철처하게 사는 이들이 있었다.

우선 그들은 혼인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거나 가정에 살면서도 독신과 정결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충분히 성서적인 배경을 깔고 있었다. 우선 완덕의 모범이신 주 예수님께서 정결과 독신의 삶을 사셨고 사도 성 바오로 역시 그렇게 살았다. 또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인 디다케에도 선교사로 일하던 떠돌이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그들 모두나 적어도 몇 사람은 혼인을 포기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1,3-12;13,1-2). 로마의 성 끌레멘스가 보낸 첫 번째 편지에도 혼인을 포기한 이들에 관한 언급이 있고 위끌레멘스 서간인 “동정녀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언급이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과 헤르마스의 목자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평판이 높은 동정녀들의 단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 당시 호교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높은 윤리생활을 한 그리스도인 수행자들의 삶이 외교인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개인 집에 살거나 함께 살면서 한시적으로 독신 서약을 하였고 선교사나 자선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서약은 교회의 지도를 받았으며 서약을 어길 경우에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종신 서약을 할 수 없는 이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혼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독신과 정결 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힘쓴 이들은 신도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는 이들을 “뽑힌 이들 중의 뽑힌 이들”이라고 평하였고 치쁘리아노는 그리스도의 양떼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수행에 힘쓴 동정녀들이 더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약혼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떼르뚤리아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구약성서 아가의 내용을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리스도의 신부란 칭호는 수세기 동안 교회의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들의 생활 양식은 피 흘리는 순교의 가장 가치있는 대용품으로 인정되었다.

치쁘리아노 성인은 수행자들은 순교의 정신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른 저술가들에 의하면, 순교자들은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수행자들은 육십 배, 혼인한 신도들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마치 순교자들이 “순교의 하관”을 받는 것처럼 동정 수행자들은 “동정의 화관”을 받는다고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대한 경고도 없지 않았다. 수행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자 이들 중 일부는 교만과 허영심에 들뜬 생활을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독신과 정결의 삶은 “성화(聖化)의 도구”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6) 사막의 성 안또니오

  (1) 부르심과 수행

은수의 영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사막의 안또니오 성인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성인의 생애는 대단히 흥미로우며 우리에게 참다운 수도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수도생활에 관한 전기는 바로 이것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은수자로 살아간 하느님의 사람의 생애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 당시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그의 고백록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즉 두 젊은이가 트레베(Treves) 근처에 있던 한 은수자의 암자에 들어가 우연히 안또니오의 생애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읽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다. 성인의 초상화는 무수한 본보기들을 만들어 내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성 안또니오의 생애를 이미 원시 수도생활의 특성과 모습으로 제시한 바 있다. 251년경 태어나 대략 20세가 되었을 때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105세에 귀천한 성인은 이상적인 은수자이자 수도자이다. 아타나시오 성인이 전하는 안또니오 성인의 생애는 대충 다음과 같다.

그는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나이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살면서 집안을 돌보고 있었다. 18세나 20세 쯤 되었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이 채 되기 전 어느 날 평소에 하던 대로 성당에 가고 있었는데,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간 일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 신자들이 그들의 소유를 사도들에게 갖다 바친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다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당에서 그 말씀이 들려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즉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하신 그 말씀이었다. 안또니오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믿을만한 동정녀들에게 누이동생을 맡긴 후 성당에 들어가니 “내일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라는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고 손수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고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였고 성서를 읽고 곰곰히 묵상하였다. 그리하여 성서 구절을 기억하면서 실천하였다. 악령과 싸워 이긴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강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20년을 살고 고향으로 돌아와도 2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함께 살았으며 여러 사람들이 그를 형제처럼 대하면서 살았다.

안또니오의 생애는 한 마디로 주님을 따라 나선 수행자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 당시 그의 생애를 듣고 읽은 많은 사람들이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인 그 영웅의 삶에 감동되어 그를 본받으려고 하였다.

그의 성소는 순수하게 복음적이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혼자 안이한 환경에 남게된 농부로서 어린 여동생을 돌보면서 가사일을 하던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나서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도들의 삶과 예루살렘의 원시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자유롭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내적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복음의 말씀을 들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을 변두리에 은거하면서 그 주민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자로 살았다. 이전에는 가장 부유하게 살던 그가 가난한 수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기도하고 땀이 흐르도록 노동을 하면서도 기쁘게 살았다. 그는 자기의 삶을 단순하게 하고 자기의 필수품을 최소한 줄였으며 자기의 생필품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영성의 현실성과 복음주의적 특징이다. 사실 수도자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수도자는 안락과 기쁨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지 사람들에 대한 업무와 그들에 관한 책임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이다. 안또니오를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간 하느님의 사랑은 게으르고 감성적이며 이기적인 관상의 열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애덕의 가장 실재적인 형태였다.

그의 기도는 항구하게 지속되었다. 그 기도는 어떤 특별한 기도가 아니라 거룩한 독서에 의해 영양분을 받는 것이었다. 거룩한 독서란 성서를 읽는 것이었다.

수행의 첫 번째는 성경을 묵상하는 식으로 읽으면서 보내는 밤의 수직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시련 중에서도 항구하게 나아가는 것으로서, 이를 정의한다면 가난하고 자발적으로 비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단식과 땅바닥에서 잠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수도자는 성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육체를 엄하게 다루어 조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것은 고행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 안에서 새로운 평정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 평정도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영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수행을 쌓아나가자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악령의 유혹이었다. 악령은 처음에는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그것은 세상과 육체의 일상적인 가면으로 드러났다. 안또니오는 그가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한 모든 것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혹시 자기 누이의 양육을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동정녀들의 단체)에게 위탁한 것이 실수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이런 그럴듯한 생각이 지나간 후에는 육체가 깨어나더니 이제까지는 극복했다고 여긴 유혹들이 강한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을 겪는 동안 그의 유일한 무기는 이제까지 해온 엄한 수행을 쉬지 않고 지속시키도록 도운 신앙과 항구한 기도였다. 안또니오의 영혼을 혼란에 빠지게 한 내적 싸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악령은 지금 와서는 온전히 자연적으로 보인 그 유혹들 뒤에 자신이 서 있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나서 공포를 주어도 세상과 육체의 덫 외에는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한다. 안또니오는 단순히 "야훼께서 내 편이 되어 도와주시니 나 정녕 원수들이 망하는 꼴을 보게 되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악령에게 응수하였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이 첫 번째 무기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것은 안또니오가 악령을 처음으로 이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또니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주님의 승리였다. 주님은 육체의 죄를 단죄하셔서 율법의 정의가 우리 안에서 성취하게 하셨다. 우리는 육체에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영에 따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타나시오 성인은 그 이후로 안또니오가 그 첫 번째 영적 전쟁에 있어서 고행을 배로 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나는 약할 때 강해진다”고 말한 사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더욱 더 강하게 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안또니오가 결코 승리를 확신하면서 안정을 누리지 않았다는 기록도 중요하지만 승리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현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더 중요하다고 보인다.  


  (2) 사막과 악령

안또니오가 고요한 곳으로 떠나 은수생활을 할 때였다.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무덤으로 피신하였다. 가까운 친구가 그에게 빵을 조금씩 가져다주었다. 그 다음에 그가 충분히 견고해졌을 때에는 단호하게 사막으로 들어가 오래되고 거의 허물어져 버린 요새 안에서 벽을 쌓고 20년간이나 지냈다. 이렇게 자리를 옮긴 것은 악령을 대항하여 싸우는 수행생활이 그의 의식 안에서 충만히 깨달았음을 얻었을 때 이루어 진 것으로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악령이 안또니오의 결정을 보았을 때, 악령은 그를 말리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였다. 그러나 안또니오는 악령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성채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우리에게서 떠나가라. 너는 이 사막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너는 우리의 음모를 참지 못할 거야"라고 악령들이 지르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어디서나 등장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원시 은수생활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악령은 주로 사막에 거주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복음적 기원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 세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다음 인생의 중요한 단계에 들어가시려고 했을 때 성령에 의해 사막으로 내보내졌으며 거기서 악령을 만나 유혹을 당하셨다는 기사를 전한다. 가장 오래된 수도원 기록들 배후에서처럼 복음서의 그 기사들 배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더불어 동시대 유다이즘에 의해 우리에게 명확해진 개념인 그 빛에로 나아가는 개념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악령의 권세 안으로 떨어진 세상이 출현하는 것을 상기해 보자. 인간은 스스로 창조의 구세주로 일어났었다. 그러나 인간은 유혹을 당하였고 악령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그러나 악령은 고요한 곳에서는 자기의 존재를 조금도 감추지 않고 직접적으로 통치한다. 같은 방식으로 악령은 무덤에 출현한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확실히 인간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덤 안에 살고 사막으로 피신한다는 것은 악령과 대면하여 그를 이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성서의 말씀에 따른다면 더 강한 자가 출현하여 강한 자의 성을 빼앗아 무장 해제시켜 무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성경과 복음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단지 신화로 보인다면 이런 현상들 저변에 깔려있는 깊은 심리적 실재들과 그 현상들이 실재들에게 주는 의미를 용이하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수행자들은 거룩한 저자들과 확실히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홀로 고요하게 지내는 것만이 자기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을 발견하고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어떤 갈등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가 느끼는 그 갈등들이란 그가 해결할 수도 없으며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고요함은 무서운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피상적인 안정성들을 폭로하게 하며 그 껍질을 깨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미지의 심연을 우리에게 열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전통을 확인하는 것처럼 고요함은 이 심연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열어 보인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이는 우리가 그 세력을 알지 못하는 한 필연적으로 노예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깨달음은 신앙의 빛을 받아 조명을 받지 않는 한 우리를 파괴시킬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악의 신비"를 무사히 우리에게 열어 보이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과거에 우리를 위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그것을 직면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옛날 수도생활에 의해 기술된 악마적 소행을 볼 때 악마적인 그 이야기들은 우리를 혼란시키거나 속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확실히 복음의 가장 심오한 진리들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고요하게 지내던 안또니오의 첫 번째 시도는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시련은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 안에서 무한히 연장된 부분으로 맥을 이루며 매우 계몽적인 해석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또니오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악의 세력에 넘어간 인상을 받는 과정 중에 밤에 당한 시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디어 내었다. 그러나 매우 순수한(오직 가식 없는) 신앙으로 견디어 냈다. 하지만 시련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의 광명의 빛이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불평하였다. “주님,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왜 시련의 초기에 나타나셔서 저의 고통을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기에 있었느니라. 나는 네가 싸우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우리는 일찍이 오리게네스가 아가서 주석서에서 보다 단순한 형태로 밝힌 주제를 여기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주석서에 의하면 건조함과 조명들의 변경들은 마치 그것이 시련과 영적 성장 안에 내재해 있는 강건함의 리듬처럼 된다는 것이다.


  (3) 세상으로 돌아옴

심오하게 신비스러운 20년간을 마음의 사막과 완전히 외딴 곳에서 보낸 안또니오는 악령과의 전쟁에 아주 친한 듯이 보였다. 그 때 그를 본받기를 열망한 친구들이 그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는 그들을 허용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드러난 방식은 이러하였다.

은수자가 고요한 생활에서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 이 기술은 많은 점에서 특이하다. 신비와 비법 전수에 관한 고대 유다교나 그리스도교 문학에 있어서 온전히 자의적으로 암시된 거동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해진 것에 관해서는 일말의 실수도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안또니오는 성전의 비밀 안에 감추어진 신비에 이끌려 갔다가 하느님의 숨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나왔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러 그가 요새에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두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몸이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지도 않았고단식이나 악령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야위지도 않았으며 그가 칩거하기 이전에 그들이 알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 깨끗했다. 또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쾌락으로 느슨해지지도 않았으며 기쁨이나 낙담으로 동요되지도 않았다. 그는 군중을 보았을 때 화를 내지도 동요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달려와 자신을 환영하는 것에도 우쭐해지지 않았다. 그는 이성의 인도를 받는 사람처럼 완전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본성을 따르는 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안또니오의 은둔을 마치 그가 세라피스의 신전에 무엇인가를 빚진 사람처럼 그 신전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생활과 비유할 문제는 없다. 안또니오가 가장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맛본 것을 수사학적 형식을 빌어 전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이중적 특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완전한 은수자는 이제 온전히 이해되고 성령에 사로잡힌 자이다. 성령은 안또니오가 더 이상 고독한 생활에 매여있지 않게 하신다. 은수생활은 그에게 승리를 주었다. 이제 승리를 쟁취한 후 성령이 그를 사로잡자 그는 자발적으로 세상으로 돌아왔거나 아니면 그가 세상을 자기에게 재결합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인 완전한 수도자는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 요한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 안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 자이다.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유혹할 수 없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그들을 인도하여 하느님께로 데리고 갈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은수생활은 단순히 완전한 사랑을 효과적으로 얻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은수생활은 안또니오로 하여금 자기 형제들의 운명에 무관심한 관상가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은수생활은 그를 다른 모든 이들 이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만들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주님은 그를 통해서 그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 몸이 아파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안또니오는 은사를 받아 슬픔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고, 서로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화해시켜 친구가 되게 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좋은 일과 우리를 사로잡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분이라는(로마 8,32) 사실을 마음에 새기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은둔의 삶을 시작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 속에는 수도원들이 생겨났고,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수도자들에 의해 사막은 도시를 이루어 나갔다.

우리는 안또니오 성인의 생애에서 다시 한번 영적인 전쟁을 치른 후 정화되고 평정된 인간성이 진실하게 변화된 두 특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성의 지배를 받고(자의적으로 “논리적”이라는 의미) “본성을 따르는 데 흔들림이 없었다”는 표현이다.

그 첫 번째 용어는 하느님의 말씀과 진실한 이성 사이에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시고 온전히 통치하시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그분의 신적 원형에 동형이 된 이성이 실제로 회복된 상태의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오직 허위의 출현이며 사물의 표면 너머로 가지 않는 속이는 지혜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 본성이 하느님께서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셨을 때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어떤 장애물도 받지 않고 침투하신 그 사람 안에 있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수도생활이 은총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오히려 정 반대이다. 수도생활이란 온전히 신앙 위에 기초를 두고 있고, 온전히 신앙으로 항구하게 나아가며 단순히 은총에 의해 자신을 포기하여 가능한 것처럼 완전해질 수 있는 삶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은총의 작용이 고통스럽다 해도 그 대가로써 인간 본성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며 회복하는 것이다. 완성을 이룬 수행자는 참으로 성숙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성숙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비록 여기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끌레멘스와 무엇보다도 오리게네스가 사용한 “그노시스적인 사람” “완전한 자” “영적인 사람”과 확실히 일치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영적인 부성이 성취되는 방법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논하는 수도자들 뿐 아니라 그 위대한 알렉산드리아의 영성 저술가들인 그들의 선임자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 완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두 가지가 안또니오와 더불어 그것을 드러낼 뿐 아니라 실감나게 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전체 금언집 안에 다시 한번 발견되고 있는 것은 증거와 권고 그리고 조명의 말씀과 치유나 악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물리적 사물에  대한 권능이다. 영적인 사람이 갖춘 두 은사, 즉 말씀과 역동적인 힘(rema kai dynamis)은 복음서에서 군중들이 구세주를 만나 얻고 체험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안또니오의 생애는 의심 없이 많은 영웅의 여러 기담을 함께 모아 합쳐놓은 설교의 형태로 그 자체가 가르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수도생활을 오직 유일한 참된 생활로 보고 이를 칭찬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포기해야만 하는 것을 단지 포기해야 한다는 심오한 관찰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자가 자유스럽게 포기하면 맺혀지는 열매는 무수하다. 즉 단지 고통스럽고 단순히 견디기만 할 때는 효과가 없는 그 빈곤이 신앙의 관점에서 자유스럽게 받아들여질 때는 스스로 생명을 주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전적으로 추구하는 삶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악령들과 그들의 환상들이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 이것들에 굴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악령들과 그 환상들이 숨어서 인간에게 너무나 강렬하게 권세를 부리지만 그것들이 수행자에 의해서 스스로 정체를 밝히게 되면 그 결과로 그것들은 신앙의 힘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이 마지막 주제들은 영의 식별을 위한 규범이 된다. 성령과 이분을 섬기는 천사들은 평화를 주며 영혼에게 영적 열망을 여는 적극적인 평화를 준다. 반대로 악령은 영혼에게 혼란과 실망을 주고 모든 것에 맛을 잃게 하며 하느님에 관한 사물들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한다. 무엇보다도 악령은 자기가 주선하는 환영에 우리를 밀착시키게 하는 것처럼 보이나 천상적 환영들은 언제나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없는 하느님을 찾도록 우리를 앞으로 재촉한다 점이다.

안또니오는 자기를 만나려고 사막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특별히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 심판, 천국, 지옥에 대한 묵상은 개인의 사욕편정과 악령의 유혹에 대항하여 영혼을 정화시키며 강화시킨다고 가르쳤다.

그는 갑자기 알렉산드리아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기서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참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또는 박해의 열정에 대한 보답으로 점차적으로 일어날 순교에 자신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안또니오는 다시 한 번 고독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이제 그는 그가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하느님과 누릴 일치 안으로 흡수되는 자신을 느꼈다. 이 불멸의 문헌은 자연발생적으로 종합되어 원시 수도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모아놓았다. 이것은 너무 진실하여 금언들을 하나로 묶어도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7. 교부들의 영성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교의적 토대를 마련한 분들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로마 황제들과 공의회들에 의해서 교회의 정통적인 교의로 인정된 참 신앙의 주도적 형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공의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들의 가정 배경을 보면 중산층 출신인 성 아타나시오와 아우구스띠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유층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매혹되어 당대의 수행 경향을 쫓아 자발적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체험을 자신들의 가정적 전통이 지닌 인문주의적 가치관과 접목시킴으로서 그리스도교 세계를 풍요롭게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자신들의 신앙 체험을 당대의 지식인들이 사용하던 (철학, 수사학, 문학적)언어를 채택하는 독창성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영적 욕구에 대해 그리스도교적으로 응답했던 것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295-373)

아타나시오 성인은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나 고전 문학에 정통하였고 교리와 성서를 배워 젊은 나이에 교회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부제로 임명되어 박학한 지식과 모범적인 삶으로 알렉산드리아 교구장의 비서로 일하다가 니케아 공의회 때는 아리우스의 이단을 공격하는 데 주력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교구장이 되어 저술과 설교로 4세기 영성을 꽃피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교구장은 교황 다음으로 힘있는 교구장이었다. 정통 교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추방과 귀양 및 일시 피신한 것을 합치면 모두 5번이나 수난을 당하였고 암살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아리우스와 그와 유사한 이단들을 대항하였다. 아리우스는 필로의 로고스론을 답습하여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지극히 완전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여 교회 안에 물의를 일으킨 이단자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오는 저서와 사목서한들을 통하여 아리우스 이단을 반박하면서 강생의 영성을 강조하였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고 인류를 구속하신 사건이 그것이다. 그는 순교자 유스띠노와 리용의 이레네오 성인들과 같이 로고스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동일시하였다. 로고스는 신적 창조력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신적 구원의 중개자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구속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모든 인간들을 같은 육체적 실존 안에 보존하는 본질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가정하고서, 인류는 구원의 로고스가 육체적 구조 안에 들어옴으로써 영향을 받은 하나의 통일된 실제로 본 것이다. 구세주의 몸,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과 죽으심과 부활하심 등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그분의 구원적 행위들로서 교회 안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전례와 그분의 삶을 본받는 사람들(열심한 그리스도인들과 수행자들)의 삶 안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강생의 영성이다. 그는 이 영성적 가르침을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을 기해 교회에 보낸 축제 사목 서한들을 제시하였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자기의 가르침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특히 105세를 살고 하늘 나라에 간 사막의 안또니오 성인의 생애를 쓰면서 아타나시오는 악령과 싸워 이긴 안또니오야말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로고스)를 본받아 성자가 된 분, 즉 강생의 영성을 성실히 살다가 성인이 된 모범적 그리스도인으로 제시하였다.

아타나시오 성인이 45년 동안 이집트와 리비아 교회들을 다스리면서도 다섯 번의 수난을 당하였으나 뛰어난 사목 방법으로 인해 체사레아의 위대한 성인 대 바실리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그 비결은 무엇보다도 신앙 공동체를 신적 강생의 전례적이고도 제도적이며 신학적 의식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교회를 하나의 완전체로 분명하게 인식하여 적용시킨 데 있다고 하겠다.

 2) 카빠도키아의 교부들

카빠도키아라고 하면 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고대 국가(현재 터어키의 중부 지역)로서 후에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지역을 말하는데, 여기서 출생한 세 교부들 바실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닛사의 그레고리오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을 마지막으로 격퇴시킨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지식인들에게 전하려고 하였고 이단을 격퇴시킴으로써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수하였다. 그들이 남겨놓은 불멸의 영성생활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성 바실리오(330-379)는 체사레아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친 덕분에 그 당시 카빠도키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의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수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할머니 마끄리나와 부모와 누이 마끄리나, 동생들인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떼의 베드로는 모두 교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젊을 때 콘스탄티노폴과 아테네에서 공부할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를 만나 절친한 친구이자 선의 의 경쟁자로 지내다가 함께 세례를 받고(27세)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영향을 받아 속세를 버리고 수행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그는 금욕생활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고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얼마동안 수도생활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시느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32세에 사제가 되고 40세에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 때까지 독수자로 살았다. 열심히 사목에 힘쓰다가 9년 후에 귀천하였다.

바실리오는 위대한 목자와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가정적인 배경과 수행생활 그리고 교회 행정과 올바른 가르침 등으로 인해 동서방 교회로부터 훌륭한 영적 지도자와 덕망있는 분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 당시와 사후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이렇게 존경해 왔으므로 민심이 천심이 아니겠는가?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을 이어 받아 자신의 실질적 교회론을 결합시켰다. 그는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과 교회 공동체를 옹호하면서 나타낸 아타나시오의 태도에 오리게네스의 학구적 태도와 신심을 결합시켰고 아리우스 이단을 반대하였다. 그의 중심 사상은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사목적이고 전례적 관습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면서 구원의 경륜(oeconomia)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조사해봄으로써 그분의 신적 본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령은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신적이므로 피조물들을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을 성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는 규범과 의식을 통해서, 성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록된 신구약의 책들을 통해서 영성생활의 직접적 근원이 되므로 이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풍부한 교회론과 성령론을 강조하여 아타나시오의 강생적 영성을 발전시켜나갔다.

그의 수행생활은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고 오리게네스의 글을 모아 필로칼리아(Philokalia)란 선집을 만들었다. 그 당시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제자들이 복음적 포기의 요구들을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받아들여 교회에 방해가 될 정도로 하나의 큰 단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실리오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정신과 반대되는 그들의 동기를 파악한 후 복음의 정신을 인문주의적 문화와 연결시켜 지혜와 고결한 인품과 교화를 선호하였다. 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동정생활이나 청빈생활을 본질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는 자선사업에 힘쓰는 목자였다. 나환자들을 직접 돌보고 병원을 방문하여 애덕 실천의 모범을 남겼다.

  

  (2)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약 329-390)

콘스탄티노뽈의 주교이자 동방 교회에서는 “그 신학자”로 불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데모스테네스”(기원 전 4세기 경 아테네에서 유명했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의 명성이었다)라고 불리면서 존경받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 성인과 친구였다. 그는 말씀 선포자로서도 열심히 사제직을 수행하였으나 침묵과 관상생활 및 금욕과 단식 등에 더 매력을 느껴 실천하였고 설교가와 시인으로 많은 영향을 준 뛰어난 목자였다.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지닌 그는 4백 편 이상의 시를 저술하여 역사와 교의및 자신의 염원들을 자서전식으로 표현하였고 많은 부분은 다분히 헬레니즘적 신비주의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의 자세를 지양한다. 따라서 그 당시 사조를 지배하던 그리스 철학을 근절시켜버리지 않았고 흡수하였다. 그리스 철학에서 제시한 영원한 진리들과 가치들은 그리스도교에 전승되어 진지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역사의 외적 현실은 바뀌었으나 그 철학은 유스띠노와 그레고리오 성인들과 같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 의해 보호되고 승화되었던 것이다. 성인의 작품들이 후대의 위인들, 에라스무스와 멜랑크톤, 기본, 뉴만 등에게 영향을 준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필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부분들은 성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과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끼친 공헌은 삼위일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노력한 점과 성령을 “하느님”이라고 과감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바실리오 성인은 이렇게까지 표현하지는 않았다). 좀 더 발전하여 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과 본질(한 분 하느님)을 구분하고 교회의 정통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적 가르침이었던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강조하였으며 철학을 연구하고 관상생활에 뛰어난 사제들을 우대하였다. 그 당시 공격을 받고 있던 아타나시오 성인을 지지하여 그가 강조한 성서 연구를 강조하였고 성직자들을 위한 성서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3)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약 331-394)

바실리오가 행정가였다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신학자였고 닛사의 그레고리오는 철학자와 신비가로 이름이 높다. 그는 교회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독서직을 받고 업무를 시작하였으나 수사학자가 되려고 교회의 직무를 버리고 결혼하여 세상의 일을 하다가 아내가 죽은 뒤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의 권유로 성직에 입문하여 형 바실리오가 시작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하던 중 닛사의 주교가 되어 열성을 다하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곤란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바실리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주요 사상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과 그리스도의 강생에 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소우주인 인간은 창세기 1장 26절의 내용처럼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은 비록 타락하였으나 자유의지와 여러 가지 덕목들을 경험하면서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를 넘나든다. 타락된 인간의 모습에만 매달리면 염세주의에 빠질 수 있으나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구속된 인간은 하느님과 우정을 회복하게 되고 물질계에서 해방되어 신적인 것에로 향하게 된다. 인간이 모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분을 모방해 나감으로써 물질계에 빠지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고 그분을 소유함으로써 그분처럼 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복된 삶을 미리 체험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는 첫 번째 과정은 “영혼의 거울”이다. 영적 감각, 즉 마음속의 모든 번민과 욕망이 사라질 때 자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신적 본성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죄스런 욕망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하느님에 의해 이 우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높은 단계는 신비 체험의 차원인데. 수행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깨끗해진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영혼은 서서히 신적인 존재로 되어 간다. 즉 영지에까지 도달하는 영혼은 하느님께 들어가고 하느님은 영혼 안에 들어가신다. 즉 상호 침투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상태는 아가페의 정점이다. 마치 16세기의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기도의 마지막 단계를 영적 혼인으로 묘사한 것과 같은 것을 그레고리오 성인은 미리 제시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신비적 상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겸손이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하시키신 것과 같다.

아가에 관한 설교 11장에서 그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단계를 셋으로 서술하였다. 첫째는 불타는 가시덤불의 빛 속에서, 두 번째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막으로 여행할 때 구름 속에서, 세 번째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이다. 이는 영혼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영혼은 맨 먼저 눈에 보이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 다음으로는 영혼이 진보함에 따라 감추어진 신비를 관상하는 단계로서 지성이 감각적인 것을 모두 가리는 구름 구실을 한다. 마지막은 영혼이 인간 본성에게 가능한 한 현세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그것은 완전히 신적 어둠에 싸인 하느님에 고나한 인식의 성소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참된 신학(theognosis)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오는 아뽈리나리스의 이단(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아 이단은 반대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였음)을 대항하여 수사학적 기교와 무서운 변증으로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는 복음서와 사도 성 바오로의 메시지에 의존하여 교리를 정리하였다. 하느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고 제대로 알 수 없으나 그분의 초월성은 인간의 정신과 유한한 본성에 합당한 논리적 근거가 된다. 인간이 덕의 길을 걸어갈 때 점점 더 영적으로 상승되어가며 신적 초월성이 인간 앞에 열려진다. 인류의 역사는 비록 인간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구원을 얻을 수 것은 이런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영적 신념들을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쉽게 풀이한 점은 그레고리오 성인의 탁월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407)

안티오키아의 부유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 크리소스또모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생활을 거쳐 사제가 되고 콘스탄티노뽈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므로 수도생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세상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면 수도생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 크리소스토모는 4년간 공동 수도생활을 하였고 2년간 은수자의 생활을 하는 동안 심한 극기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아 안티오키아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4세기 안티오키아는 교회적으로 다소 복잡하였다. 인구의 비율로 보아 비신자들이 숫적으로 우세하였고 행정과 학원들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주교들의 대다수는 아리우스 이단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가톨릭 교회는 바울리노 주교와 멜레티오 주교가 주도하는 두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요한 크리소스또모가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다행히도 훌륭한 어머니의 지도하에 신심생활과 좋은 교육을 받고 수도생활을 거쳐 사제가 되어 설교가와 성서 주석으로 교회의 일을 하다가 콘스탄티노뽈의 주교가 되어 고행과 전교와 자선 등으로 사제생활에 힘쓰면서 교회를 성실히 돌보았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무질서를 바로 잡는데 주력하였다. 사제들의 윤리생활을 강조하고 떠돌이 수도자들을 정주시켰으며 악한 표양을 주는 이들에게 윤리생활을 강조하여 과부들은 혼인을 하거나 그리스도인 신분에 맞는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반대의 무리도 있었으나 백성들의 호응이 좋아 교회는 쇄신되어 나갔다. 뛰어난 웅변조의 설교와 정확한 교리 해설로 인해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좋은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설교와 빛나는 덕행은 동료 성직자들과 부패한 궁전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민중의 지지도가 높아 황제의 세력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으나 음모가 극도에 달하여 결국 귀양을 가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유해는 로마로 모셔졌다. 동정녀와 사제직에 대한 저서는 유명하다.


 4) 성 힐라리오(315?-367)

불란서의 쁘와띠에의 저명한 가문에서 출생한 성인은 보르도에서 훌륭한 문법학자들과 수사학자들로부터 고전 문학과 철학을 배운 것으로 보이며 혼인하여 “아브라”라는 딸을 하나 두었다. 그 후 성서를 읽던 중 하느님에 관한 고상한 표현들과 이교도들의 신화에 드러나는 물질주의에서 차이점을 깨달아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였다. 트리에르의 주교 막시미누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육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하던 중 쁘와띠에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친아리아파에서 주관한 베지에르의 지방 종교회의에서 아리아파와 논쟁을 벌이던 중 정통파 아타나시오 주교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콘스탄씨우스 2세 황제의 명에 의해 프리기아로 추방당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 신학을 공부하고 서방 주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책을 썼다. 361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뚜르의 마르띠노(군인 개종자)를 받아들여 리규제에 수도원을 세워 그를 원장으로 임명하여 수도생활을 권장하였다. 갈리아 지방의 수도생활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말년에는 아리아파가 갈리아와 이딸리아에 저질러놓은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열성을 다하였다.

성 힐라리오는 거룩한 삶과 훌륭한 지도와 학문적 업적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강조하여 신앙 생활의 지표로 삼았으며 갈리아, 이딸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그리스도교 윤리생활을 강조하여 생활을 개선시켜나갔다. 가톨릭 교회를 일치와 보편성 그리고 파괴될 수 없는 신자들의 단체로 인정하여 이교도들을 대항하였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훌륭하여 후대의 위대한 학자들인 아우구스띠노와 토마스 아뀌나스 성인들도 그의 작품을 인용할 정도이다. 그는 기본적인 교리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강화하여 야만족들의 대이동 중에 일어난 아리아파들과의 갈등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킨 인물일 뿐 아니라 그리스 세계와 라틴 세계의 중개자로서 서방 영성의 선구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851년 교황 비오 9세는 이 위대한 성인을 보편 교회의 박사로 공포하였다. 

 5) 성 암브로시오(334-397)

성인의 생애를 읽을 때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한층 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인은 세례도 받기 전에 군중들로부터 주교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의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선출된 그는 그리스도교 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의 지도에 있어서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성인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34년 경 현재 독일의 트리예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서 귀족 교육을 받고 공직에 진출하여 에밀리아-리구리아 속주의 총독이 되어 수도 밀라노에 거주하였다. 374년 봄,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던 날에 폭동을 예방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는데 주교 후보자들 편에서 환호하면서 모두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추대하였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던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에 주교직을 수락한 그는 공부하여 세례를 받고 주교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였다. 특히 그리스 전통을 학교로 삼아 오리게네스와 교회의 교리와 성경을 공부하였다. 또한 친히 강론 원고를 작성하고 친필로 책을 저술하였다. 동정녀들과 과부들에 관하여, 성령론, 아브라함, 진복팔단, 성사론, 성직자들의 의무에 관하여, 루가 복음 주석서, 헥사메론 등 수없이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특히 수사학에 뛰어났던 젊은 아우구스띠노가 성인의 강론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갔다가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어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외에도 성인은 로마 제국의 동부 지방과 서부 지방의 그리스도교 영성을 중개하는 인물로서 필로,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저서를 번역하고 쉽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유산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용시킨 인물이다. 그이 탁월한 언변은 듣는 이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그의 전기를 기록한 빠울리누스는 암브로시오가 어린 아이였을 때 잠을 자고 있었는데 벌떼들이 몰려와서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는데 이는 꿀처럼 달고 자양분이 많은 그의 언변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인은 또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권위로써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적으로 훌륭한 통치자와 사목자로서 평온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다. 그리하여 백성의 민족적 정체성을 성화시켜 나갔고 로마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융합하여 영적 통일을 이룬 인물이었다. 특히 윤리 생활을 강조하여 영적 위기에 처해있던 그 당시 백성의 생활을 건전한 그리스도교 생활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6) 성 예로니모(331-420)

성경학자였던 성인의 생애는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준다.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한 성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로 귀를 기울이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2디모 3,15)

성인은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국경 근처 달마티아의 스티리돈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젊을 때 로마에 유학하여 공부하고 세례를 받았다. 친구와 함께 트리예에 가서 힐라리오 성인의 저서인 “종교회의”와 “시편 설교집”을 필사하였고 은수자들을 만나 그렇게 살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 얼마 후 사막의 안또니오 성인의 생애를 읽고는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 2-3년 간 시리아의 사막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인 작가들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때 시리아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다. 그리고 역사적 방법과 우의적 성서 해석학도 배웠다. 380년 경 콘스탄티노폴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로부터 감명을 받고 오리게네스의 “예레미야서 설교집”과 “에제키엘서 설교집”을 번역하였다. 그 후 로마로 돌아와 3년간 교황 다마수스의 신학 고문과 번역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언어 능력을 활용하였다. 이 때 장님 디디무스의 저서 “성령론”과 오리게네스의 주석과 아가서에 관한 두 편의 설교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교황의 요청으로 당시 라틴어 성경을 개정하여 단일한 표준 역본을 만들었다. 이를 불가따 성서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도 라틴어로 된 표준적 성경으로 남아 있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마르첼라와 빠울라를 위시한 여러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강의하였다. 성인은 불균형적 성격 탓으로 인격적인 결함이 있고 혼인보다 독신이나 금욕생활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로마인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회의 사람으로서 인정이 많아 불우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수행에 힘쓴 인물이었다. 그러나 더 뛰어난 점은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 영속적인 중요성을 지닌 저서를 낸 데 있다. 그가 번역한 구약성경은 4-5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조잡한 라틴어 어법을 위대한 문학 수준으로 높였으며 히비리어와 당대의 랍비의 주석을 사용한 덕분에 오리게네스처럼 유다교와의 생산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였으므로 서방 그리스도교 영성은 수세기 동안 신적 계시에 대한 히브리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가 특히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저작들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시리아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하였으므로 서방 교회에 귀중한 성경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영적 교훈을 전해 줄 수 있었다. 성서에 대한 그의 업적을 인정한 교회는 공의회 문헌 계시 헌장에서도 그의 말을 다음과 인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계시헌장 25항). 성인은 8세기부터 교회의 교부로 인정되었으며 뜨리덴띠노 공의회는 성인을 성경 주석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공포하였고 교황 베네딕도 15세와 비오 12세는 성경에 관한 칙서를 통하여 그를 극찬하였다.


 7) 성 아우구스띠노(354-430)

성인은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사상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 하지만 성인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세인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만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이후에는 참회자들의 모범과 신앙의 변호자로 그리고 탁월한 사목자와 신비가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그의 생애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처럼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인은 354년 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아와 튜니지아의 국경)에서 로마 제국의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 빠뜨리치우스와 어머니 모니까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교인으로 살았으나 아들의 출세에는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았으며 아들이 마니교에 빠졌을 때나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졌을 때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늘 기도하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머리가 뛰어나 수사학을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으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의 학식과 인품에 감동되어 오랫동안 심취해 있던 마니교를 버리고 신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차차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의 회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암브로시오 주교의 스승 성 심쁠리치아누스(St. Simplicianus) 신부였다.

회개한 아우구스띠노는 수덕생활에 힘쓰면서 사귀어 오던 여성을 멀리하고 친구들과 함께 까씨치아꿈이란 시골로 은퇴하여 기도와 독서, 노동과 대화를 나누면서 조용한 생활을 하였다.

36세에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던 중 놀라운 언변과 훌륭한 삶으로 평판이 좋아 성직에 임명되었고 39세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종들이라고 불렀다. 4년 후에 교구장이 되어 설교와 편지, 토론과 저술 등으로 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어 나갔다.

여기서 성인의 공로를 필설로 언급한다는 것은 부족할 뿐이다. 학자요 사목자며 수덕자인 그는 125편 이상의 저술을 통하여 철학과 신학의 독보적 사상가로 뛰어날 뿐 아니라 덕을 쌓은 성인이자 훌륭한 사목자로서 그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성인의 전기를 기록한 뽀씨디우스(Possidius)에 의하면 성인은 430년 8월 어느 무더운 날 침상에 누워 임종을 준비하면서 참회의 시편 일곱을 써서 벽에 걸어놓게 하고는 기도하면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그 많은 작품 중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성인의 기도 체험과 가르침, 특별히 주님의 기도에 관한 해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8.  아우구스띠노의 기도


 1) 아우구스띠노의 기도체험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그가 얻은 기도의 체험은 어린아이로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어느 날 배가 몹시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를 하고 나자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갑이 많았기에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청소년기부터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한 때는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의 덕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의 기도는 혼신의 정을 다 바쳐 의지를 움직일만한 강렬한 기도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들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동안 깨어있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그런 경우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제의 생활이 먼 훗날에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딱서니 없고 젊은 이 놈은 청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당신께 순결을 빈다는 소리가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다소 쾌락을 찾는 생활과 마니교 사상에 빠져 기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세례성사를 준비하던 중 이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건강의 임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나은 일이 있어 그는 기도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도 체험은 바로 자신의 회개였다. 그는 자기 회개의 은혜를 어머니 모니까에게로 돌렸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원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남하게 나한테 베푸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한 마디로 회개 후의 그의 생활은 기도로 일관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떤 때 탈혼(脫魂 ecstasy)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단적인 예로서 어머니 모니까가 이승의 삶을 마감하기 얼마 전 母子가 로마 근처 오스띠아(Ostia)에서 상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기도 중에 탈혼 상태에 빠졌다가 한참 후 깨어나서는 천상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불멸의 걸작 고백록(Confessiones)은 그 자체가 기도이며 죄의 고백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감사, 흠숭 그리고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어울려진 기도서이다. 독백(Soliloquies)이란 저서도 긴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자신과 독자들의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의 존재와 신비를 보다 잘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쓴 저서로서 중년에 시작한 그 힘든 작업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는데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그 어려운 작업을 끝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랑에 매혹되어 넋을 잃어버립니다.” 진실한 철학자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굴복하기 마련이고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과 신학을 탐구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그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높은 차원에서 관상(觀想)하였고 신비가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들, 예를 들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수도자들이다.

훌륭한 사목자였던 그는 강론과 편지를 통하여 기도에 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도에 관한 그의 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띠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에 의하면, 설교가의 사명은 단순히 성경을 주석하고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활동을 계시한 역사서이다. 구약성경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사랑의 권고를 받은 것이다.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사랑을 움직인다.”하고 한 그의 표현에서도 그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사도 성 요한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잇다. “당신들은 (성경)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종교의 실재는 옛날부터, 아니 인류가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있어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소 지나칠 정도로 이런 표현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과거에 생존한 사람들 중 의롭게 산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떠나서는 구원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본고향에서 온 편지로서 모두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향이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려고 하는 본고향이며, 사람인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는 그 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행복과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요한 14,6)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목적이자 그 곳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시므로 그분은 인생 여정에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과 가까운 분이 되신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사실을 기도와 연관을 지어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끝난다. 기도는 결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2)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1) 기도의 문제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은 우주의 주인이시자 진선미성(眞善美聖) 자체이신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고 흠숭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는 인간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제 당신이 내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생심하옵나니…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로 끌려가듯이 인간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며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바로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는 데 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인간이 비록 하느님을 찾았다 해도 계속해서 그분을 찾아야 하는 작업이 이승의 삶을 사는 한 언제나 요구된다. 이는 “발견된 하느님은 찾아야 한다.”(Deus inventus quaerendus)는 그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을 더 감미롭게(dulcius) 또한 더 욕심을 내어(avidius) 찾아 만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비교법의 두 부사(dulcius와 avidius)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한다는 그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 있으며 시편 저자의 정신과 일치하여 자기의 심정을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리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보소서 주여, 당신 앞에 내 마음의 이 귀들을. 입을 열으사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바로 나라고. 이 목소리 뒤로 내달아 가서 당신을 붙잡고 말으오리다. 당신 얼굴을 나한테서 감추지 마옵소서. 차라리 뵈옵고 죽으리다, 아니 죽기 위해서.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행복의 올바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소위 훌륭하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기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에 관해서 모르고 있으므로 기도할 때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양떼들에게, “형제들이여, 하느님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미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있다면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성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음에 달려 있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사랑은 각자가 알고 있는 사물의 성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그 대상을 함축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관심도 적어지고 정신도 산만해져 사물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어떤 것도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완전히 알지 못한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인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그 열망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은 피조물에 대하여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해 참 행복을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으려고 한다. 결국 이 세상의 피조물이 좋은 것이로되 올바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식어 버린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별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고백록 서두에서 이렇게 제기하고 있다.


주님,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당신을 기리는 것이 먼저 인지, 혹은 당신을 아는 것이 부르는 것보다 먼저 인지 저를 알게 하소서, 알아듣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누구 있어 당신을 모르면서 부르오리까?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첫 시도는 하느님을 알도록 도움을 청하는 청원의 기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께 간구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어떤 거짓 신에게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랑의 무질서로 인해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은 이 무질서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시켜줌으로써 하느님을 올바로 알게 해 준다. 예수께서도 산상성훈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하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믿음은 의지의 혼란을 가라앉힘으로써 마음의 눈을 뜨게 하여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혼란한 마음의 감옥에서 해방되도록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하느님께 도움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우구스띠노가 양떼들을 가르칠 때, “기도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계시를 통해 믿는 바는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그분은 영원하시므로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 충분한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대해 확신이 서지도 않을 것이며 본능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안다고 상상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충분히 성찰한 다음 위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변화되도록 또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도록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어떤 것을 따로 말씀드려 하느님께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 있겠는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친구의 생각이나 계획을 변경시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로 변화되시거나 정보 제공을 더 많이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를 분명히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定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의 말씀드림일 것이다.


  (2)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성경을 읽어보면 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은 지대하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기도하셨다.

주 예수님의 이러한 생활모습을 복음사가 마르코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일상생활이 기도와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는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것은 언제나 오랫동안 기도하심으로써 생활 전체를 아버지께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복음서를 보면 그분의 일상생활 중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기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고(루가 3,21),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가시어 40일간 그곳에서 지내셨을 때도 기도하셨다(루가 4,1-13). 또한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루가 6,12),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마르 6,46),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에도(루가 9,18), 거룩한 변모 때도(루가 9,29), 최후 만찬 시에도(루가 22,32; 요한 17장), 게쎄마니 동산에서도(루가 22,41-44),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다(루가 23,33-46).

루가 복음 11장 1절에 의하면 늘 기도하시던 스승의 모습이 제자들의 호기심을 대단히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래서 그들 중 하나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백성의 영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닐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자기들도 그런 것을 배우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자기들이 따라나선 예수님만이 온갖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지식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하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기도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응답이며 대화를 시작하시는 하느님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감히 그분께 요구할 수 있으리오?”하고 반문하였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으뜸가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그 가르침은 기도의 교훈 안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3) 이교(異敎)사상의 위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의 가르침을 펴실 때 우선적으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부터 지적하신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유다인들의 기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결점이자 악습인 위선(僞善 hypokrisis)을 피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이는 회당이나 길거리에 서서 남이 보라는 듯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겉꾸미는 행동을 말한다.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대역(代役)을 하고 있고 실제로 자기네들과 다른 사람들로 보이려는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기도의 행위(act of prayer)에 지나지 않는다. 위선자가 기도할 때 그의 마음은 하느님께 있지 않다. 그는 겉꾸미는 행동으로 신심 깊은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것을 보고 칭찬하려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이런 경우 위선자는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위선자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그런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느님을 누리기 위한 사랑을 결(缺)하고 있다”하고 비판하였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방인들의 전형적 잘못인 기도의 방법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 7-8).

기도할 때에 말을 너무 많이 한 이방인들은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神)들에게 말을 많이 늘어놓아야만 그들을 굴복시켜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방인들도 神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神을 다른 용도로 이용해 보려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마치 법정에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대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변호사는 어리석게도 사건 자체의 진상 규명과 변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근거도 없는 변론을 펴면서도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대는 자기의 달변만 믿고 검사와 판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기도를 말의 힘에만 의존한 이방인들의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띠노가 사목한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이교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류에 빠져있던 신자들의 정신을 바꾸어 보려고 대단히 노력하였다. 비록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부(富)나 병의 치유 또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신전에 가서 빌기 일쑤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 뱃사공들은 불안감을 없애기 위하여 넵튠(Neptunus=바다의 신)에게 빌지 않고는 배를 타지 않는구나!” 그래서 착한 목자였던 그는 그들의 생활을 보고 슬픔에 잠겨, “그들은 만사가 순조로우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지만 무슨 불상사가 생기거나 화급한 일을 당하면 점장이나 마술사에게 가버리는구나”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그 신자들이 자신들을 변호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옛날에 믿던 신들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요?”라고 반문하곤 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인다운 참 기도의 자세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그분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도를 이해하려면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묵상해야 한다 그분은 그 때 당신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좌절과 고통이 극도에 달해, 루가 복음사가에 의하면 실제로 핏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장차 닥쳐올 엄청난 그 사건을 감수할 힘이 없어 올리브 동산을 떠나 당신은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박한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렸고 이제까지 가르쳐 온 당신의 가르침에 진실한 者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가르침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날 즐거웠던 시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경고한 바 있는 기도의 두 오류를 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도움을 겸손 되이 청한 후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들을 뒤로 하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 하셨다.“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장차 닥쳐올 고통을 면하게 해주시도록 간절히 청한 예수님의 그 기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뜻만을 우선적으로 앞세우심으로써 참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분의 기도는 분명히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달랐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정하여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복적(祈福的)인 기도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가 최선의 기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끔 고통과 실망을 안겨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성서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은 오직 그분의 사랑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그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며 진실한 행복임을 웅변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좁은 식견이나 기복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면 그것은 위선자나 이방인의 부류에 들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그리스도인다운 기도라면 그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의합하게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하고 하였다. 이 한 마디는 영성생활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으로서 그는 이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적이므로, 이는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없음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여러분의 기도가 사랑하는 그분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하고 가르쳤다.


  (4) 기도는 열망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기도를 단순히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순수한 기도는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善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누리기(frui)위하여 이 세상을 이용(uti)하지만 惡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누리기 위하여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아우구스띠노는 “그들은 富를 얻고 재정적인 손실을 막기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지만 주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는 쉽지만 하느님 자신을 열망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마치 선물을 주는 사람보다 선물 그 자체에 마음이 더 쏠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기도가 본질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열망하는 것이라면 늘 기도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지당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항구하게 하느님을 열망하기만 하면 언제나 기도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우구스띠노는 서신 교환을 하던 어느 교우에게, “우리가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식지 않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으면 언제나 기도하게 됩니다”하고 편지한 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긴 기도의 연속이 될 수 있다. 반면, “열망이 식으면 기도는 잠을 잔다”는 그의 표현처럼 “식어버린 열망으로 기도문을 외우거나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올바른 경신 행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은 기도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으며 참된 기도를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설이다(마태 6,6).


이 말씀은 기도를 언제나 문을 닫아걸고 하라는 뜻은 아니다. 아우구스띠노가 가르친 것처럼 순수한 기도는 땅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느님을 열망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면 그것은 하느님과 나누는 마음의 대화이다. 마음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리이자 인간 자신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마음으로 청하고, 마음으로 찾고, 마음으로 두드리면 하느님은 마음의 호소에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cor sursum)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변화되는 측은 하느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느님과 나누는 마음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의 권위자였던 성 요한 끌리마쿠스(Climachus, +650)는 마태 6,6의 “문을 닫는다”는 말씀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가르친 적이 있다. “네 독방의 문을 육체에 닫아라. 말하고 싶은 네 입술의 문을 대화에 닫아라. 네 영혼의 내적 방을 악령에 닫아라.” 이를 풀어 말하면, 마음을 수직하여 육체의 정욕을 피하고 입을 조심하여 말을 삼가며 심령을 굳게 하여 악령의 유혹을 물리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이자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성경에 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시며 인간사에 별로 개의치 않으신다고 쉽게 단정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풍요나 축복의 신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건설해 나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하느님께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이들은 마치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차 한 잔이 나오듯이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린이다운 순수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분히 기복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에서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방식은 비신앙적이거나 아니면 세례는 받았으나 제대로 복음화 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심이 깊다는 사람들조차도 천둥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는 “하늘이 노했구나”하고 말할 때가 있다. 이런 표현은 전적으로 외교인의 사고방식이다. 이는 또한 하느님이 사랑이시며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계시의 초보 단계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못살게 굴거나 열심히 간청하기만 하면 하느님도 피곤하게 되어 할 수 없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는 예언자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과 싸움을 벌인 그 유명한 사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알의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을 하나의 강력한 절대 군주처럼 생각하여 오래 간청하기만 하면 설득되는 그런 분으로 여길 때가 있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점을 자기의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의를 보시고 화를 더 내신다든지 선업(善業)을 보시고 더 행복해지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달이 차고 기울 듯이 변화되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 성 요한의 말씀처럼 하느님사랑이시다(1요한 4,8). 아우구스띠노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모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말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다 간결하게 표현한다면,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으로 응답함이다. 따라서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자만 그래도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기도를 주셨다.


 (1)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운다.

예수님은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 방법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는 기도에 대하여 따로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은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우게 된다. 마치 목수가 목공일을 계속함으로써 능숙한 목수가 되듯이(Faber fabricando fit faber) 기도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기도는 체험이지 기도의 기술을 익히거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다. 기도할 때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열심한 말이나 아름다운 기도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 자신을 얼마나 적게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느낌에 따라 기도의 정도를 평가하거나 하느님도 우리의 구미에 따라 변화되시는 분으로 대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이 올바른 신심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신비적 현상이나 이와 유사란 것들이 등장하여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을 훨씬 초월하는 분이므로 우리가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비와 더불어 살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신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긴장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상상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므로 우리 안에 형성된 그분께 대한 신심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고통스런 체험(실망과 좌절)을 맛보기 때문이다.

한편 아우구스띠노는 회심한 이래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고 그분께 대한 풍부한 체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게 체험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도를 가르칠 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였으며 참된 기도는 체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고백록의 다음 구절은 하느님을 체험한 그의 심정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우리가 이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띠노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그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은 스스로 만족스러운 신심이 아니라 자기 생활에 대한 부족함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이었다. 초기 작품인 독백(Soliloquies)에서도 그는 하느님과 자신을 알고 싶은 열망을 기도로 표현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사랑의 확산이었고 하느님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었다. 이 지식의 두 형태는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통찰하려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한계점을 깊게 인식하고 체험할 때 가능해 진다. 아우구스띠노는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내 자신 안으로 들어오라는 타이르심에 타인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왔삽고, 그리 될 수 있삽기는 당신이 나를 도와주신 때문이었습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에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체험이며 기도함으로서 기도를 배우게 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강의를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기도를 주심으로써 그들이 기도를 체험하게 하셨다.


 (2) 영원한 행복을 위한 갈망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주님의 기도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인간의 갈망이 내세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사가 마태오(6,9-13)와 루가(11,2-4)가 전하고 있는데, 청원의 수는 각각 다르지만 아우구스띠노는 서로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일곱 가지 청원을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곱 가지 청원 중 처음 셋은 영적인 은혜를 위한 것이고, 나중 넷은 현세의 도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사후(死後)에 누릴 영원한 행복을 갈망한다면 이 지상의 사물들도 장차 누릴 영원한 세상을 위한 준비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일곱 가지 청원은 모두 永生을 위한 것이지 그 중 어떤 청원도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한 청원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고방식은 다분히 플라톤적이며, 특히 신플라톤사상(Neo-Platonism)에 세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일곱 가지 청원을 드립시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과 멀어져 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일치된 기도는 본질적으로 본고향(Patria)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염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나그네(peregrinus)라고 부르곤 하였다. 영원한 세상을 염두에 둔 그는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피난살이 정도로 여겨 양떼들에게 이렇게 가르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본고향에 대한 열망이 자라야 합니다.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현세적인 축복을 원하거나 이 세상의 행복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이 세상의 행복과 안정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행복에 대한 희망을 모두 하느님께 두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며 귀양살이 하는 인류가 본고향을 그리워하는 염원 내지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염원을 강렬하게 염두에 두었던 그는 강론을 통하여 양떼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 형제들이여, 노래부릅시다. 휴식을 취하면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기운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도 노래하면서 여행합시다.” 본고향으로 가는 순례의 여정에 있어서 이 세상의 재산은 그 여행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면 족하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에 방해가 된다. 그는 또 말한다. “피조물을 생각할 때 그것에 빠지거나 호기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생에 나아가는 디딤돌로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약한 본성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세상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아니라 본고향처럼 여겨 이 곳에 빠져버리거나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네 가지 청원은 인생의 본 목적에서 이탈하려는 강한 경향들과 투쟁하는 데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3) 주님의 기도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의 善하심을 찬미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가 벌써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의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려질 권리가 있거나 그런 영예를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사 그리스도의 상속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아버지”라는 칭호를 묵상할 때 우리 마음 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이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자신을 관대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의 생사를 온전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창조주이신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후세에도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이 기도의 서두는 경외심과 감사의 정을 자아내며 우리의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여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합당하게 하도록 인도해줄 뿐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성찰할 기회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소년이 저명한 가문에 양자(養子)로 입적되어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양자로 입적되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초자연적인 공로를 받아 모든 권리를 상속받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우리 개개인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참조. 마태 5,43-48)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와 그들은 모두 그분의 사랑 받는 양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상속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야 하며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신분 구별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빈부의 차이나 지역 감정, 민족과 피부색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 당시 심각했던 사회적 신분 격차, 즉 하인과 주인,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서로 형제처럼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가르치곤 하였다.

주님의 기도 서두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부르고 있지만 하늘(ouranos)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아우구스띠노는 순진한 양떼들에게 가르치기를 만일 하늘이 장소적 개념이라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기도문의 의미는 하느님이 성인(聖人)들과 의인(義人)들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며 사도 성 바울로도 같은 의미로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고린 3,17).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멀리 여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그분을 만나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우구스띠노가 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오랜 방황을 해 오던 그가 회심한 후 고백한 바를 젊어서는 결코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그와 함께 계셨고 그를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았나이다… 님은 나와 함께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이란 하느님이 성전처럼 거하시는 의인들의 마음이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는 이 기도문을 바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도 거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뜻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장애물이나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들로부터 해방되어 자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하느님을 모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삼의 내주(內住)현상으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시는 상태이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맛볼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영성생활이다.


      ②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이 기도는 하느님이 거룩하시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참된 행복의 근원으로 깨닫도록 청하는 기도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계시를 이 세상이 받아들이도록 청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비는 기도이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온갖 장애물을 우리에게서 멀리해 주시도록 비는 청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되도록 비는 기도이므로 우리를 위한 축복의 기도라고 하였다.


      ③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왕국(basileia tou theou)은 우선 하느님의 영역이나 통치를 말한다(시편 103,19; 145, 11-13; 이사 52, 7 ; 마르 9, 47; 10, 15. 23-25; 1고린 15, 50; 갈라 5, 21 등). 또한 그 나라는 의인들이 누릴 영원한 거처이다. 그 나라는 우리가 기원하든 기원하지 않든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기로 되어 있는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 하느님이 그 나라를 온전한 자유로써 통치하시도록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통치하심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도록 청하는 기도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도 그 나라의 한 몫을 얻어 누리도록 기원하는 청원인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오도록, 또한 우리도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가 그 나라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기 위한 청원인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그 나라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므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겸손 되이 청하는 기도이다. 마치 눈먼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마음속의 소경됨이 치유되어 성인들의 대열에 들 수 있도록 겸손 되이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도 예리고의 두 소경이 크나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시도록 큰 소리로 간청하자 자비하신 그분이 그들의 소경됨을 치유해 주신 사건(마태 20,29-34)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④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아우구스띠노는 이 기도문을 해석할 때 많은 부분을 성 치쁘리아노(St. Cyprianus)의 주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얼마나 많이 애원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의 출발점으로서 그는 하느님의 뜻의 성취는 인간의 계획과 사고방식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는 인간이 하느님께 협조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뜻은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저주받은 자들에게 이루어지지만 오직 구원받을 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함으로써 그분께 호의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드리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그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여러분이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행하십니다”하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기도 안에는 현재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도록 청하는 염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도록 하느님께 무조건 청하는 것이다. 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므로 전능하신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앞세워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우리는 이 청원에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한다. 그 분은 십자가의 형벌을 원하지 않으셨으므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 청원문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이 청원문은 천상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비는 기도이다 천사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사랑의 분열이 없는 존재들이어서 행복의 근원을 오직 하느님 안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존재 전체를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므로 실수로 인해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거나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청원은 우리도 천사들처럼 우리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여 충만한 행복을 누리도록 염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청원에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증오심을 버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기도하자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우구스띠노는 이런 외적인 요소 외에 염두에 두어야 할 내적인 요소가 있는데, 특별히 이 청원에서는 개개인이 수덕생활(修德生活)을 하면서 겪는 마음의 전쟁(戰爭 bellum cordis)에서 해방되도록 청원을 드리는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청원에서 “하늘”은 정신을, “땅”은 육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으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잇는 인간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바를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상에 맞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 청원을 통하여 인간의 갖가지 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tia)이 사랑으로 승화(昇華)될 것이고 영육간의 투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완덕(完德, perfectio)을 지향하는 청원의 기도이기도 하다.

또한 이 청원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교회를 위하여 비는 기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수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도 그 머리이신 분의 뜻을 본받아야 한다. 한편 영적 투쟁 중인 지상의 교회(Ecclesia militans)는 그 안에 죄 많은 지체들을 안고 있으므로 죄인들의 교회(Ecclesia peccatorum)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청해야 할 것은 느슨한 생활을 하는 죄인들이 하루 빨리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고 교회도 그 창설자인 그리스도께 완전히 동화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하는 청원에서 드러나는 분명한 내용은 하느님의 뜻이 인간 삶의 모든 면에 두루 퍼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뜻이 완전히 수행되는 그 날 인류는 온전히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우리가 이 청원을 드릴 때마다 위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하고 권고한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청원은 주님의 기도의 첫째 부분이며 주로 영적인 것을 청원한 반면 다음의 네 가지 청원은 주의기도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은혜를 청하는 기도이다.


      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소서.

이 청원은 육신과 영혼의 양육을 위한 기도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일용할 양식(panis quotidianus)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육체적인 필수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말하며, 두 번째는 천사들의 빵이자 우리 영혼의 음식인 성체를, 세 번째는 교회가 매일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든지 부자든 가난하든 이 기도를 바칠 때는 하느님 앞에서 걸인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은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강조하기를 부(富)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청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매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을 위하여 두 손을 모을 것이 아니라 매일이라도 성체를 모실 수 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교회와 일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분의 몸으로 모인 우리가 그분의 지체들로 변화되어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의 음식이 되어 오시는 주님을 모심은 주님과 하나됨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이를 누리는 사람은 “선은 저절로 넘쳐 흐른다(Bonum est sui diffusivnm)는 원리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 특별히 어렵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성찬의 기쁨을 전해주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영혼의 양식이다.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약식이다(요한 6,35).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일같이 묵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하느님이 계명”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약한 인간이 세속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쉽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고 거기에 심취되어 살아가야 하며 매일 교회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말씀의 양식과 찬미가로 힘을 얻고 회복하여 수덕(修德)에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⑥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이 청원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사도 성 요한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죄인이라는 사실이다(1요한 1,8).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에도 자주 실수하고 죄를 범하므로 매일 용서를 받아야 한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하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지 못할 만큼 중대한 죄는 아니라도 하느님께 적절히 응답하기에는 부족한 실제적인 장애물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사소한 죄나 잘못은 비록 모래알같이 미소하지만 그것이 조금씩 쌓여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납덩이같이 되어 크고 무거워진다고 하였다. 또 다른 강론에서는 그것들은 배 안으로 스며드는 물방울 같아서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얼마 후에 배를 가라앉힐 만큼 큰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미소한 죄들은 누구에게나 위협적일 수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까지도 사소한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 겸손 되이 기도한 세리(루가 18,10-11)처럼 우리도 겸손 되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기도는 작은 죄들을 없애주므로 그는 주님의 기도를 매일 바치는 세례성사로 여겨 이를 바치도록 권고하였고 바로 이런 이유로 영성체 직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매일 이 기도를 바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 사람들의 잘못까지도 용서해 주겠다는 결심을 하느님과 하게 된다. 산상설교의 주석에서 아우구스띠노는 이웃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로 보아 용서해 달라는 청을 받든 받지 않든 무조건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내 원수가 언제까지나 나를 싫어하여 공격해 와도 나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기도문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청할 때에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고 명하셨다. 아우구스띠노는 인간의 경험으로 보아 남을 먼저 용서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거만하게 굴더라도 또한 그들이 나에게 화해를 청하기 전이라도 여전히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황금률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착한 목자였는지라 양떼들의 영성생활을 위하여 용서의 한계까지도 구체적으로 설정해 놓았다. 용서를 청하기 전이라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채무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법적으로 소송절차를 밟지 않으면 갚지도 않거니와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므로 만일 그들이 갚기를 거부한다면 비록 나로 인해 그들이 죄를 범하였으나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인 그는 세례 지원자들에게 행한 강론에서 용서 청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용서를 청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수덕생활은 할 수 있어야 주님의 기도를 정당하게 바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상적인 가르침은 원수들이 용서를 청하든 청하지 않든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주 예수님의 추종자가 실천해야 하는 제자다운 삶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 신자들에게 행한 강론에서 사울에게 박해를 받아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한 거룩한 부제 스떼파노(사도 7,60)를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아우구스띠노가 가르친 용서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마음에서 온갖 미움을 몰아냄이요, 둘째는 용서를 위한 모든 소청(訴請)을 들어줌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성실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교정(矯正)하고 벌을 주는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경우 용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 그는 이런 경우 범죄자를 원상 복귀시켜 준다는 동기로만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혹시 책임자의 선의(善意)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동기들이 범죄자들을 충동할지도 모를 일이므로 책임자는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벌할 것은 벌하고 혹시 이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자기가 실수 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띠노는 용서하는 것과 진정으로 사랑의 방법으로 교정하며 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용서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기 위하여 우리는 늘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청원에 우리가 진실해진다면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정당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진실한 용서란 우리의 노력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한계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청한다면 그분은 분명히 우리 마음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는 겸손에 있다고 보았다. 사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이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사랑의 완성에 있으므로 아우구스띠노의 가르침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야 하므로 행위를 보고 성덕의 척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참조. 마태 7, 20). 이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띠노는 사도 성 요한의 말씀 외에 따로 인용할 말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용서의 문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직결되므로 진실(veracitas), 유화(affabilitas), 공정(equitas)과 같은 윤리덕이 요구되며 인간 개조에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이 가끔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의 주제를 다룰 때 미움(odium)은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에게보다도 미워하는 사람 자신에게 훨씬 더 파괴적이라고 본다. 원수라 하더라도 사람의 중심인 영혼은 파괴하지 못하지만 미움은 영혼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눈멀게 하여 사랑의 가능성을 영혼에게서 빼앗아가므로 영혼을 죽이는 죄악인 것이다.


      ⑦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잘못한 죄의 용서를 청한 다음 미래로 눈을 돌려 온갖 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 청원은 약하디 약한 우리의 처지에 너무나 강한 유혹이 몰아치면 죄에 떨어지게 되므로 그런 유혹에서 구하여 달라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연약한 처지에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으시도록 특별한 청원을 드리는 것이다. 사실 유혹은 우리의 삶에 적극적인 면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유약함과 당신의 위대하심을 가르치시는 것도 역시 유혹을 통해서이나 악에 떨어지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신다(1고전 10,13).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으나 거기에 떨어지지는 않으셨다(마르 1,13). 오히려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 더 많은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모든 유혹을 없애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약한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유혹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을 계속하는 한 온갖 내적 갈등과 분열이 지속될 것이나 오직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에 의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⑧ 악에서 구하소서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이상적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유혹 그 자체와 이것과 관련된 마음의 전쟁(bellum cordis)에서 구하여 달라는 청원으로 끝난다. 이 청원은 공포와 불안, 전쟁과 유혹이라고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내세(來世)의 평화와 축복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아우구스띠노가 고백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한 것처럼, 영원한 안식일을 향하는 그리움과 탄식을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이렛날만은 저녁도 없고 해넘이가 없나이다. 따로이 축복하시어 무궁토록 길게 하셨음이니이다. 당신은 고요하신채 창조의 업을 하시었어도 매우 좋은 그 일들을 끝내신 후에 이렛날에 안식을 취하셨다고 성서의 말씀이 말해줌 같이 당신이 주시기에 매우 좋은 일들을 우리가 한 후에도 영원한 생명의 안식을 당신 안에서 누리게 하신 것이니이다.


이상으로 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이상적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훑어보았다. 이 기도는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주어진 기도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기도를 해설하여 양떼들에게 가르치면서 일곱 가지 청원들 중 이 세상의 삶을 위한 것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본고향인 내세를 동경하는 염원과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하느님 중심의 기도를 바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인간의 선입관을 과감히 수정해 나간다. 의식주와 건강 그리고 번영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 심지어는 좋은 날씨 등 온갖 기복적인 청원기도는 모두영생을 향한 열망에 종속되고 승화(昇華)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열망을 고무시키기 위하여 아우구스띠노는 다섯 번째 청원 기도(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 청원이야말로 주 예수님이 기도와 연관지어 가르치신 여러 말씀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전제하면서 만일 이 청원을 잃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비로와 지기를 원하시므로 사람들은 이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불행해질 수 있는 요인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욕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돌릴 수 있도록 전적인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4) 말의 기능

기도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의 열망이라면 기도에 있어서 말을 기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기도는 내적인 행위이므로 말이 없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도 안에서 말의 중요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암송하고 반복할 수 있도록 기도를 주신 것이다. 그분이 주신 기도는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주님의 기도 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제기되는 질문은 기도에 몇 마디 말이라도 꼭 필요한가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은 인간의 말에 의해 변화되시는 분이 아니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런 유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기도에는 말이 꼭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말로써 하느님을 움직이거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도록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들을 우리가 알고 그 열망을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기도 안에 등장하는 말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적 이상(理想)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열망들을 그것에 따라 형성 시켜 준다. 그러므로 말의 목적은 하느님을 움직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에 집중하면 마음을 맑게 하고 순결하게 하여 영적으로 우리 안에 주입된 하느님의 선물들을 훨씬 더 많이 받게 된다” 라고 가르쳤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자극시켜 하느님의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받들고 우리도 그 이름을 받들 열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청원들은 우리를 위하여 합법적인 욕망의 선을 그어준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에서 제시된 일곱 가지 청원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았다고 주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지향을 놓고 기도할 때 주님의 기도의 청원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다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별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이 가르치신 기도의 형식은 확실히 우리 모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성장되어 하느님께 이르게 되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란 때때로 마음속의 깊은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만이 있을 것이고 그 신음이 점진적으로 깊어져 기쁨의 환호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라는 탄성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의 체험을 양떼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느님은 선하십니다. 그분이 어떤 식으로 선하신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할 수도 없거니와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만일 말할 수도 없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오직 기쁨의 환호성을 외칠 뿐입니다.”


 4) 예수님은 의사이시다.


 (1) 마음의 치유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는 참 스승인 동시에 모든 병고와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온갖 질곡까지 치유해 주시는 참된 의사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무질서하고 잘못된 사랑 때문에 발생한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을 재결합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시는 의사이다. 이교인들 뿐 아니라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사랑하여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은 이런 잘못된 사랑을 제거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가정(假定)들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앙 안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은 인간의 사랑에 혁명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불신의 영역에서 신앙의 영역에로 나아가는 통로를 만드신다”하고 하였다. 그분은 인간을 당신에 대한 믿음에로 이끌기 위하여 갖가지 시련을 주시며 그분에 대한 충성심에 위기를 주신다. 이 외에도 그분은 다른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심으로써 행복과 성취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보이신다. 이런 과정은 실제로 아우구스띠노 안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체험이었다. 그는 “오 주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시련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을 기억했나이다. 우리의 무지는 우리를 더욱 더 불안스럽게 하였고 마침내 우리는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향하였더니 빛이 생겼나이다.”하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한 인간의 회심은 본질적으로 개개인 안에 있는 사랑의 회심이며 그 사랑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리는 작업이다. 이 과정은 인간 실존의 모든 관점에서 볼 때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기의 사랑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 관해 그는 여러 가지 명언을 남겼다. “중력의 법칙에 끌리듯이, 영혼은 사랑에 이끌려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고 끌려갑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각 사람은 그의 사랑이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는 땅이 될 것이오.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여기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대는 하느님이 될 것이오. 여기에 대해서 감히 나의 권위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군요. 성경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인 신들이라고 말하노라”하는 말이 있지 않소.


말하자면, 각 사람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결단과 의지의 작용에 의해 형성되어 나간다. 이 작용이 신앙 안에서 올바로 형성되고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나아갈 때 완덕에 이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잘 파악하여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고 대단히 중히 여기는 것과 자기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려고 하며 그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사랑의 대상에 따라 영성의 원리인 집착과 초탈의 대상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 종속될 것이나 사랑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면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 종속될 r서이다. 그러면 그 결과로 그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과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갈망하는 행복의 가능성을 하느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이 행복이나 만족의 근원을 피조물에게 두고 그것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피조물의 희생물과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자기의 과거 경험을 근거로, “이런 사람은 자기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섬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이 이끄는 데로 끌려가기 때문이며 그것을 제거하려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하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쇄신시켜 인간 자신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되돌린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의 시야를 넓힐 수 있으며, 그런 좋은 선물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기도가 인간의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처지를 깊게 묵상하면 잘 알 수 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을 갈망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해서, 진정한 기도는 마음속의 갈망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이런 관점의 기도는 일찍이 시편 저자가 체험하고 노래한 것과 일치한다.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 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 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로다(시편 27,4)


인간이 자기의 모든 갈망들을 이 “하나의 것”에로 통합시켜 나갈 때 기도와 사랑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하느님께 대한 갈망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사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아우구스띠노가 지적했듯이, “그의 소리가 인간의 귀에는 요란하게 울릴지 몰라도 하느님의 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시편 저자가 “야훼여, 온 마음 다하여 당신을 부르오니 대답하소서(시편 119,145)라고 간청한 것처럼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 있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부르짖으면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도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올바로 기도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도생활에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두 번째로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을 보다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인 진실한 기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열망의 기도

기도에 관하여 하나의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즉 하느님이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하시고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왜 사람들은 굳이 그 행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또한 왜 하느님은 사람이 그것을 청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으면 그 선물을 누릴 수 없다. 이는 마치 귀먹은 사람을 음악회에 데리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 사람은 무대 중앙과 가장 가까운 특별석에 앉아 있어도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에 감사드리려면, 우선 감사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한 후 기도에 의해 욕망을 단련시켜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부족하면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열망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사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오로지 성스러운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사실 여러분은 열망하고 있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열렬히 열망함으로써 정신이 온전히 열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장차 보게 될 것을 잠시 연기시켜 놓으심으로써 우리의 열망을 증가시켜 주시고 우리 영혼의 수용력을 확대시켜 주십니다”하고 하였다.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정신의 수용력을 확대시켜야 하며 이는 일생을 통해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조건은 이 세상이 주는 것들에 대해 불만족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미워하지 않는 한 자기가 되고자 하는 이상형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런 창조적 불만족에 대한 좋은 예는 스승에게 간청한 제자들의 청원에서 잘 드러난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가 17,5).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만일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선물이 증가되어도 실제로 큰 효과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앙의 열망을 실천에 옮겨 보도록 그들이 당신의 문을 두드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항구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고취시키려고 하셨다. 예를 들면, 정의를 찾고자 노력하는 과부의 비유(루가 18,1-8)와 한밤중에 이웃 사람에게 빵을 구하는 사람의 비유(루가 11,5-8)는 바로 기도의 항구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비록 도움을 늦게 주시더라도 우리가 청하는 바를 진정으로 열망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스승의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항구하게 청하는 이는 그것을 분명히 얻을 것이다.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 또는 생선을 청하는데 그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 (마태 7,7-11)


아우구스띠노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내적인 갈등 속에서 받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주고자 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부족한 부분을 성찰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친구에게 빵을 청하는 사람의 비유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루가 11,5-8). 그 비유에서 빵을 여유 있게 가지고 있지 않던 그 사람은 평소에는 빵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을 받고는 비로소 자기 집에 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의 우연한 방문의 결과는 그가 남에게 베풀고자 할 때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어느 기회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희망에 대하여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그는 자신의 삶과 믿음에 대하여 한층 더 새롭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참조. 1베드 3,15).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처럼, 누구든지 질문을 받게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하게 되고, 부족함을 깨닫게 되며, 또한 가르치고자 할 때는 스스로 배우고자 노력한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께서도 비록 사람들의 청원에 더디 응답하신다 해도 사람들이 반복해서 청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더디 주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청하는 것을 더욱 더 갈망하도록 배려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무 빨리 주시면 그 은혜가 너무 값싸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3) 행복을 위한 청원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끔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로마 8,26)라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표시이다. 쁘로바(Proba)라는 로마의 귀부인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우구스띠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 질문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 영성생활에 오히려 크나큰 장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만일 우리가 행복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의 대상과 주체가 다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소위 철인(哲人)이라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궁리하고 토론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해 왔다. 아우구스띠노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키케로의 호르뗀씨우스(Hortensius)를 숙독한 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실 그의 호기심은 비록 늦게 이루어지긴 했으나 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키케로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하여 쁘로바(Proba)에게 행복한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누구든지 자기가 바라는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고, 원해서는 안될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진술에 의하면 행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한 개인의 욕망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근원을 소유하는 일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자기가 추구해본 행복한 삶에 대한 체험을 근거로 하여 오직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만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킨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쁘로바가 아우구스띠노의 도움을 받아 추구한 행복도 자기의 모든 열망을 오직 하느님께만 두고 실제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하느님 자신을 소유하기 위한 열망이며 한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여러 가지 부수적인 열망들을 모두 이 하나의 열망에로 모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 욕구인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자기 삶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가 쁘로바에게 조언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삶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그는 키케로의 주장에 따라 행복한 삶이란 “영혼과 육신이 영원 불멸하고 타락하지 않는 상태일 때 하느님의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관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을 영원토록 관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므로 이런 열망을 키우기는 참으로 힘들다. “행복한 삶”은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평화(필립 4,7)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우리 마음속에 그릴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열망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으로 알 수 잇다. 재산과 명예가 좋고 어느 정도 필요하며 행복의 조건은 될지언정 그것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더구나 이런 것을 잃고 난 후 괴로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인간의 한계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제한적 행복의 조건들을 넘어 영원히 지속적인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적절한 대상에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 안내자는 성령이시다. 사도 성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향하여 정진하고 있으나 신음할 수밖에 없으므로(로마 8,25)영의 인도를 받아 나갈 때 무지에 빠지지 않고 올바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까지도 승화시킬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띠노는, “구하라, 받을 것이며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 16,24)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행복의 주제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였다. 몸이 아픈 사람은 하루 빨리 풀려나도록, 그리고 항해하는 사람은 무사히 귀향하도록 하느님께 간청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실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청원들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기 전에 먼저 무엇이 우선(prioritas)적인지 곰곰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물질적인 축복을 청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즐길(frui) 수 있는 것을 청한다면 나머지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맞도록 배려하신다고 가르쳤다. “형제들이여,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에 대한 희망 안에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착한 목자였던 그는 양떼들에게 이 세상을 것들, 즉 재산, 건강, 부귀, 명예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좋은 것이지만 더 좋은 것, 즉 영적인 선물을 청하도록 가르치곤 하였다.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하느님께 청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거저 사랑하십시오. 오직 그분만을 갈망하십시오.” 이는 “하느님을 거저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 모든 희망을 두는 것이며 그분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4) 물질의 축복을 청함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 우선적으로 영적인 선물을 하느님께 간청하라고 가르쳤으나 어떤 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두 손을 모으는 것도 정당하다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그의 사목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당시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은 기도한다 하면 단적으로 물질적인 축복을 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런 식의 기도는 지극히 낮은 단계의 기도라고 하였다. 그가 사목한 신자들은 대부분 이교 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므로 비록 세례는 받았으나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격이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오직 하느님께만 드리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신도들 중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에게 악을 내리도록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의 신이 아니라 악령 같은 존재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우리 목자는 그런 식의 기도는 죄가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축복을 기원할 때는 각자의 조건이나 구미에 따라 청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맡기면서 청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는 주님의 기도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며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한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우는 데 있다.

아우구스띠노가 사목하던 그 당시는 이교사상이 사라져 가고 그리스도교가 인정을 받아 로마 제국 안에서 하나의 큰 힘을 과시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적인 인정이나 출세 또는 유력한 사람들과 결혼을 하기 위해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를 사목적으로 이용하여 그 사람들의 인간적인 동기를 그리스도께 돌리는 계기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충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느님 자신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세례는 받았다 해도 이교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보다는 그분이 주시는 선물에 더 큰 관심과 기대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께 재산의 축복을 기원한다면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에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것은 재산이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에 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이 세상은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여정임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이 지상의 것들은 영원한 본고향에 이르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것이면 족하다. “하느님은 여행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원히 살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는  여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이 이런 마음 가짐으로 기도한다면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청원이 영원한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착한 목자였던 아우구스띠노는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는 각자의 욕망을 적당히 조절하여 영원한 행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반적인 청원을 드리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가르쳤다.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청원은 일반적인 청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물질적인 은혜와 축복만을 청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기도이다. 이런 사람은 의사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환자와 같아서 그는 의사의 처방은 무시하고 자기의 구미에 맞는 약과 음식만을 청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영혼의 의사이신 하느님은 고통의 약을 처방하심으로써 어떤 청원이 정당하고 당신의 뜻에 맞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적인 축복을 청하는 데 있어서 구약시대 의로운 사람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신의 존재 전체를 위탁하시면서 드리는 이 청원은 호구지책을 걱정하면서도 현세 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린 청빈한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는 기도이다.


저에게는 당신께 간청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제 생전에 이루어 주십시오. 허황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 7-8).


  (5)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가르치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분은 특히 고통과 번민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이는 이 지상의 삶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진리를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부와 쾌락을 누리는 사람들보다도 영원한 고향과 거기서 누릴 행복에 대한 욕망과 동경을 더 많이 지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우구스띠노가 사목하던 양떼들 중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목자로서 그들에게 이 세상의 고통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포도 짜는 기계에 넣는 포도와 같아서 고통은 좋은 열망들로 채워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참 행복을 갈망할 수 있기 때문에 홀로 하느님만이 행복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누구도 지적인 분석을 통하여 물질에서 이탈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간은 이 일상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신앙 안에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양떼들에게 “규율은 듣고 읽거나 생각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진다”라고 가르쳤다. 그가 의미하는 규칙은 환난을 통한 가르침(instructio per tribulationem)이었다. 하느님은 고통과 번민을 통하여 개개인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고백록의 여러 곳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가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의 매질에 대한 두려움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 고통이었다. 어느 강론에서 그는 “왜 하느님은 이 세상의 기쁨에 고통을 주십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이러한 고통과 환난의 아픔을 통하여 영원한 달콤함을 동경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고통을 통하여 통찰력을 주시도록 청해야 한다. 이런 유의 통찰력은 각자의 고통과 실망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그것을 관념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실제로 빠스카의 신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통과 좌절, 낙심 등은 우리의 인간성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여 인간 내부의 무질서를 알게 해주며 그 무질서를 치유해 줄 수 있는 분을 찾게 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조화와 무질서를 통하여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될 때 그런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도움을 주시는 분에게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무수한 악의 요소를 제가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순조롭게 일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쳤던 것이다.

인간의 내적 고통과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상의 의원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한 그는 순박한 교우들에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끈으로 붙잡아 매거나 어떤 때는 살을 도려내어 수술을 하기도 하며 마실 물과 음식을 금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환자에게는 고통스럽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를 신뢰하고 이런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의 백성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큰 마음으로 신뢰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많은 무질서가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들은 고통받기를 기대할 것이고 사실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기들의 진정한 성찰의 기회로 이용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환자가 의사에게 자기가 원하는 치료법만을 강요한다면 그는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그분께 사정하여 그 순간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상의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건강을 위해 하느님께 쉽게 도움을 청한다. 이런 점에서 병은 사람들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우구스띠노의 주장은 병이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으므로 비록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를 계기로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라면 훌륭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건강이든 어떤 일이든 시련의 때에는 일단 뒤로 물러나 하느님께 호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그는 충고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호소할 때는 무조건 호소하기보다는 자신을 겸손 되이 낮추면서 우선 죄를 고백하고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애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로하게 될 뿐 아니라 치유될 수도 있다. 물론 큰 고통이나 깊은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이런 방법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결코 타협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기도 하였다.


여러분 자신을 의사의 손에 맡겨져 있는 환자로 상상해 보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병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온 생애가 하나의 병이고 오래 살게되면 누구나 병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지금 병에 걸린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잇다는 생각은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의사에게 청해서 술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술이 여러분에게 해롭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상상하여 시무룩하게는 되지 마십시오. 그대의 몸을 책임지고 잇는 의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면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영육의 의사이신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더 기꺼이 참고 견디어야 하겠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 하느님께서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해 버리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예수님과 함께 비탄의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분은 큰 소리와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였다(히브 5,7). 올리브 동산의 기도에 이어 십자가상에서도 시편 22장을 읊으셨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우구스띠노가 지적하였듯이, 비록 하느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미루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분이 미루시는 것은 그분의 신비스러운 뜻이지만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고 더 심각한 병, 특히 영혼의 병들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준비 기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6)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체험이지만 하느님께 아무리 간절한 청원을 드려도 그분이 응답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띠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양떼들로부터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다는 불평을 듣고는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하여 여러 번 설명하였다.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험에 따라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은 성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기도의 스승이신 아우구스띠노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약 성경에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예는 사도 성 바울로의 기도의 체험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 사도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늘 자기를 괴롭히던 육체의 가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해도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2고린 12, 7-8).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정신에 온전히 사로잡혔던 사도까지도 청원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 좋은 예를 우리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 사도의 청원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건강한 몸으로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간청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주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누구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인간의 예상과는 달랐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55, 8-9).


이런 예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생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듯이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성공하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사탄이 하느님께 욥을 유혹하도록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쉽게 들어주셨다(욥 1,11-12). 이와 비슷하게 신약성경에서도 마귀들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은 쉽게 허락해 주셨다(마태 8, 31-32).218) 이어서 아우구스띠노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대표적인 예는 십자가의 죽음을 멀리해 달라는 당신 아드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마태 26, 39).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훼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는 용케도 응답을 받아 그들은 사막에서도 물릴 정도로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민수 11장).

이상의 예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과 가끔 착한 사람들의 기도는 거절되고 반대로 마음씨 고약한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응답 받지 못한 기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느님은 진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사람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신다는 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느니라(마태 7,8).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그대가 하느님께 청할 때 이런 지향으로 청하시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도록, 그리고 하늘나라를 주시도록, 또한 그분의 아드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 그분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청할 때 그대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시오.” 사실 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언제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를 성실히 한다면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명백한 조건을 제시한다. “야훼는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진정으로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18). 아우구스띠노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진실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드물다고 보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관심을 두지만 대부분 기복적인 관심만 둔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은혜보다 오로지 하느님 자신에 관심을 두는 사람만이 그분의 이름을 진실로 부를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만족하며 비록 하느님이 고통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아들인다. 요한 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응답 받을 기도의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신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낳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다 이루어 질 것이다”(15,7).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manere in Christo)은,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영생을 갈망하여 쉬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이다. 기도할 때 소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기도의 원형인 주님의 기도 안에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욕망을 새롭게 할 때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며 이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어 질 것이니라(요한 14,13)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원의를 청할 때는 반드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은 구원자이신 임금(Salvator Rex)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과 상관없는 것을 청한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올바른 믿음을 두면서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사람만이 이 지상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진실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이 지상의 이익만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여행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도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야 하므로 부분적으로는 이 지상의 삶을 위해서도 청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내용들이 진실한 행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것이라도 영생에 나아가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이 지상의 것을 감히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지 못하고 세상의 조류에 휘말려 세속 사람들처럼 기도한다고 아우구스띠노는 걱정하였다. 이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회개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이 세상 사물의 가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 인생의 최대 염원인 영생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지상의 이익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복적(祈福的)인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러한 기도를 일단 거절하심으로써 구원자로서 자부적(慈父的)인 사랑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심으로써 하느님은 인간을 혼란스런 욕망에서 구하여 주시는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아우구스띠노가 서신 연락을 하던 어느 교우에게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정당하지 못한 요구들을 거절하심으로써 인간의 탐욕이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은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로마 5,5)라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하느님이 참으로 좋은 의사이시므로 환자가 함부로 요구하는 청은 전부 거절하시고 오직 환자에게 필요한 약만 주시는 의사와 같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성 바울로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지혜로 보실 때 그에게 고통을 주던 “그 육체의 가시”는 그 자신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의 안달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환자의 치유를 위한 치료법만 사용한다. 하느님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활동하신다. 바울로도 그 고통을 통하여 당신 삶의 목적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으므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수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10).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은 아우구스띠노의 어머니 모니까가 자기 아들이 이탈리아에 가지 않도록 간청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여기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한사코 나를 붙들며 가지 말라느니, 나랑 같이 가자느니 하던 내 어미를 속이면서… 그날 밤 나는 몰래 떠났고, 어머니는 혼자 남아서 빌고 울기만 했던 것입니다. 주여, 어머니가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무엇을 당신께 빌더이까? 그저 떠나지 말게 해 주십사 하는 이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깊이 통촉하시와 결국 어머니의 긴한 소원을 들어 주시었으나 그 때의 기도만은 돌아보지 않으셨으니 어머니가 항상 빌고 바라는 것을 내게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다시 언급하지만,  사도 성 바울로에게도 일어났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도록 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네 상처를 치료하는 이는 바로 나로다. 나는 치료하는 법도 알고 있고 그 상처를 언제 없앨지도 알고 있노라”하고 부언하였다.

한 편, 사탄은 욥을 유혹하도록 하느님께 청하자 하느님은 그 청을 들어주셨다(욥 1,11-12). 또한 악령들도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께 청하자 그들은 요청을 들어 주셨다(마르 5, 12-14).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청은 저주를 받았지만 바울로의 청원은 치유되기 위하여 거절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열렬히 청하면 그 청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답해 주신다. 그분께 기도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아도 다른 면에서 우리는 하느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후하게 주시면,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루가 11,13). 여기에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순종할 것입니다(루가 17,6). 사도 성 요한은 기도의 효능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그분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또한 그분께 청한 것들을 이미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1요한 5,15).

아우구스띠노는 성서의 가르침을 주석하면서 인간의 죄가 도덕적이며 영적인 병을 초래한다고 보고 이를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치려고 하였다. 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사물의 실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하느님의 돌보심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야 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분의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환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께 간청하여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실망하지 말고 항구히 청하면서 꼭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진실한 열망은 영원한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므로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마음을 정화시키고 참된 청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7) 기도와 활동

청정심(淸淨心 puritas cordis)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생동안 가꾸어 나가야할 이상적인 덕목이다. 원죄의 결과와 사욕편정으로 인해 흐려진 마음의 정화와 교정은 진정한 회개와 꾸준한 수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청정심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되게 기도할 수 있게 하고 예수님처럼 타인에게 봉사하게 한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단식과 자선을 함으로써 합당하게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이기심과 세속적인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단식이란 음식을 삼가는 것 이상이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삼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불화와 불일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식을 끊거나 절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미움과 다른 여러 가지 악습들은 영혼을 죽이는 독약과 같다. 그러므로 그는 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전제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가 6, 37-38).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자선 정신과 더불어 순수한 기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그분 자신을 염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 구체적으로 사순절에 맞는 강론을 하였다. 즉 자선과 용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이다. 첫 번째 날개는 이웃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마음 안에서 성취되며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하느님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된다. 사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진심으로 용서할 때 사람들은 평화스럽게 기도할 수 있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하는 기도문의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다. 이 청원은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에 함축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느님께 이르는 두 번째 날개는 외적 활동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이다. 아우구스띠노 시대에는 잉여 재산이 있는 자들만이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간린(avaritia)에 빠진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와는 상관없이 세상과 이웃의 어려움에 무관심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자선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며 주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가 6, 30.38). 사도 성 바울로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전제하면서 자선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엿다.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아우구스띠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선은 가난한 이웃 사람들을 자신과 대등하게 보는 것일 뿐 아니라 의무라고 가르쳤으며 부자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강도와 같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물질적인 희사 그 자체로슨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자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참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희사만이 그리스도인다운 자선이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께 이르는 기도의 날개이며 세속적인 동기나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참조. 마태 6,2-4) 이런 관대한 정신을 지닌 사람만이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선을 통하여 변화되고 죄 사함도 받을 수 있다. 이럴 때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되어 청정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이 두 날개를 달만큼 합당해지면 하느님께 대한 열망은 더 이상 관념적인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꼴을 갖추게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선행이 없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목소리만으로 청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마시고 여러분의 생활로써 하느님께 청하시오”하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지속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며 “내 혀로 당신의 옳으심을 찬양하리이다. 온 종을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35,28)라고 노래한 시편 저자의 마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하루 종일 입으로 찬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해 인정하면서 각자의 임무와 일상 행위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온 종일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일상생활 중 기도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양떼들에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 목록에는 식사. 유흥, 사업, 농사일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런 일상의 일들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며 영원한 안식일에 부를 알렐루야의 서곡이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평소에 하고 있는 선한 생활은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게 하므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하는 열망과 더불어 완덕 추구에 정진하게 하며 참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의 무질서를 치유해 주시도록 은총을 구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이 세상의 것들로 참 행복을 구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자는 예리고에서 주님께 부르짖은 두 맹인처럼(마태 20,29-34) 마음의 혼란을 치유해 주시는 그리스도께 부르짖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분으로부터 마음의 소경됨과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마음의 캄캄함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아우구스띠노는 선한 행위와 활동은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어 청정한 마음을 지니게 되어 실제로 통찰력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사실 시편 송가나 성서의 말씀들이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처럼 비치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효과를 받아 누리지 못한다. 오직 계시의 빛을 받아들여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사람만이 하느님 사랑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여 그 신비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찬미하는 그 진리를 실제로 살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강론에서 잘 드러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시편을 노래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소리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지 말고 여러분의 선행이 그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목소리만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여러분은 가끔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온 생활로써 주님을 찬미하게 되면 결코 침묵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드러낸다. 목소리, 생활 그리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활동 등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야훼여, 목청껏 당신을 부르오니 대답하소서(시편 119,145)라고 기도한 시편 저자와 같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신비체의 머리이시다

  

  (1) 기도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아우구스띠노는 기도를 가르칠 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방향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 외의 어떤 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마음을 혼란시키며 그분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영성생활의 장애물이며 심한 경우에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장애물이며 하느님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앞세우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죄로 인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분열되어 있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대상들을 사랑함으로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마음의 평정을 맛보지 못함을 스스로 체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삶의 궁극 목적을 향해 방향을 다시 잡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궁극적인 목적에도 이르지 못한다. 원칙적인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柔弱性)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는 열망이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자력(自力)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넣어주시면 비로소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도 성 바울로의 사상이며 아우구스띠노가 기도의 신학을 전개할 때 사도의 영향을 깊게 받은 부분이다. 예를 들면, 바울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하고 하였다(2, 13). 이와 비슷한 내용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 44). 여기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설명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매력적인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아들에게로 이끄신다고 하였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신(Pulchritudo tam antiqua et tam nova) 하느님께 대한 계시(啓示)는 인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끌려가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랑의 끌림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 존재가 어떤 대상을 진실로 사랑하면 거기에는 “왜”라는 설명이 필요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물체는 무게에 따라, 영혼은 사랑에 따라 어디로 이끌리든지 끌려간다”는 표현 그대로이다. 이러한 연유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는 설명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그는 양떼들에게 한 강론에서, “여러분 중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리라 봅니다”하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체험이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노력해 보아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체험할 때가 많다. 아우구스띠노는 사도 성 베드로와 바울로 대축일 미사의 강론에서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약점을 깨달았고 뉘우친 후에야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전 최후 만찬상에서 베드로는 자신 만만한 태도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 참조. 요한 13, 37)라는 말로 스승에게 충성을 보이긴 했으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자만심에 빠져있었으므로 자기가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고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스승이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인간 노력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이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5)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또한 진심으로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약점과 주님의 이끄심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도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을 찾는 과정에서 고되고 쓰라린 체험을 한 바 있다. 18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키케로(Cicero)의 호르뗀시우스(Hortensius)를 읽고는 모든 지식을 소유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으나 그는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그 후 12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는 그분께로 돌아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체험은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죄의 감옥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우선권을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이오니 명하시는 바를 주시옵소서. 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

위의 체험과 비슷하게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그도 하느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자기의 실수와 기대에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 안에 사랑의 불을 질러 놓으시면 그 사람은 끌려갈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한없는 은총이다. 이는 아우구스띠노의 신학에 수없이 등장하는 핵심사상이다. 그는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은총이 인간의 사랑에 작용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은총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은총은 사랑의 영감으로서 우리가 개념적으로 파악한 거룩한 사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사랑의 영감을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기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주장하기를 하느님은 인간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기도를 통하여 인간이 당신을 갈망하게 하신다. 그 결과는 인간이 더욱 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다. 은총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은총이 없이는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의 충동을 받아 마음이 혼란해지므로 유아도 통치욕(統治慾, libido dominandi)이 있어 사람들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자기 주위로 끌어 모으려 한다. 이는 인간적인 모든 경향들 중 가장 파괴적인 욕망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사욕편정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영원한 사물보다는 현세적인 사물을 더 탐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를 영혼의 욕구라고 정의하였다(…libido quoque ipsa recte definitur, Appetitus animi quo aeternis bonis quaelibet temporalia praeponuntur). 그러므로 인간이 영혼의 파괴적인 이런 욕구를 극복하려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 하느님은 주도권을 취하사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셨다(참조. 요한 3, 16). 인류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 아드님은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신다(참조. 1디모 2,5).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내적인 것으로 만드신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상이한 역할들은 한 위격의 활동이 끝나면 다른 위격의 활동이 시작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대내적 활동을 통하여 교류하신다(circumincessio). 아우구스띠노는 여러 저술에서 세 위격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이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록에는 하느님의 세 위격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오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누가 전능하신 삼위일체를 알아듣겠나이까?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이를 들어 말 못할 이가 뉘리이리까마는 성삼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그 말하는 바를 아는 영혼이란 매우 드무나이다. 억지를 쓰고 토론을 벌여도 이를 정관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띠노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애써 설명하려고 시도하였고 세 위격이 어떻게 존재하며 또한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지성, 의지가 존재와 기능의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 1, 26).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시라면 그것에 대한 희미한 관념이 인간에게도 있을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으므로 영혼의 기능들이 각각 분리할 수 없이 작용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그와 비슷하게 작용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세 기능에 대하여 각각 분리하여 설명한다 해도 두 기능을 제외시켜 놓고 다른 기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의 영적 기능들의 활동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하여 약간의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세 위격이 독립적으로 구분되지만 인간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는 동시에 그리고 상호 분리됨이 없이 작용하신다.


아무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없이 성부로부터 구원될 수 없고 성부와 성령의 작용 없이 성자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없으며 성부와 성자 없이 성령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없다. 우리는 한 분의 진실하시고 유일한 하느님, 불사 불멸하시며 영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이다.


인간의 회개와 성화에 있어서 세 위격이 분리될 수 없이 함께 활동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성삼의 다양한 역할에 대하여 알아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무질서한 욕망의 존재를 꿰뚫어 보시며 당신의 아름다우심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인도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 관해 사도 성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아무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1고린 12,3)라고 가르친 것처럼 인간에게 성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승에서 예수님을 만났거나 사도들이나 그 후계자들의 말을 들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구원의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이 모든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에 있어서도 비록 주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리지만 기도 그 자체가 벌써 세 위격 모두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된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의 한 부분이다. 이 진리는 주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치셨고(참조. 요한 10,38 ; 14,23 ; 15,1-6 ; 17,21 ; 1요한  4,16 ; 1고린  3,16-17 ; 6,19 ; 2디모 1,14)기도를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라고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신앙 안에서 믿고 고백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삶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다(1요한 3,9)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세례성사를 받은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분과 친교를 맺고 은총 상태에 머무는 한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는 마치 복중(腹中)에 있는 태아가 어미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받고 있듯이 은총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 더욱 더 풍성해지는 삶을 살아가고(요한 10,10)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 ; 갈라 4,6)로 부르며 영적인 인간이 되어 이상적으로는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20)라고 자신 있게 고백한 사도 성 바울로의 정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도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2위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신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조심스럽게 설명하기를 성자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들 사이에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인간과 삼위일체 사이에 중재자가 되신다고 가르쳤다. 그분은 실제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실 수 있고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신적인 진리를 가르치신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구하시는 겸손한 의사이시다. 아우구스띠노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37)를 다음과 같이 주석한 것은 참으로 재미있게 보인다. 길에서 반쯤 죽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을 발라 싸매 준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얻어맞고 모든 것을 빼앗긴 이 세상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의 치유활동은 그분의 지상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전구하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 내용은 사도 성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잘 명시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시는 분입니다(로마 8,26). 이와 비슷한 내용을 사도 성 요한은 묵시록에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고 희생되셨으나 이제는 살아계시며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영원한 제물을 봉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묵시 5,6).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우구스띠노가 설명하였듯이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시지만 인성(人性)으로 인해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지만 인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상 생활 중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만 당신 자신도 늘 아버지께 기도하심으로써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참조. 루가 11,1-4 ; 마르 1,35 등).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당신의 사명, 즉 그분을 믿는 이들이 모두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어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는 사람들이 당신의 영광과 생명에 함께 참여하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당신 자신을 약한 인간성에 일치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조건을 상승시키사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한 그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사도 성 바울로가 다음의 말로써 이미 가르친 바 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고린 12,27). 이 말씀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제 2의 그리스도이며(Alter Christus) 그분과 동형(同形 conformitas)을 이룬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었으니 기뻐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그분이 머리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우리와 그분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머리와 지체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머리와 지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당신의 한 부분으로 여기셨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러한 일치로 인해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몫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특히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를 잘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아우구스띠노는 시편 주석서에서, “머리는 지체를 위하여 울부짖었다. 머리는 지체들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키셨다”라고 하였고 어떤 강론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4)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그러므로 전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이며 일부는 영광을 누리는 하늘의 교회이고 또 다른 일부는 죄악과 투쟁하는 지상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 것의 일부가 이미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곳은 지존하신 하느님이 거처하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본고향이므로 그곳을 그리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히 일치시킴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점차적으로 성장되고 완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아우구스띠노는 개인의 열성과 노력만으로는 이런 열망을 성취시킬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사도 성 바울로에 의하면 이런 특별한 도움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로마 5,5).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 안에서 일치의 원동력이 되신다. 성령은 교회를 하느님 아버지와 더불어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며 보다 완전하게 하여 지상에서 강생을 지속시키신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강론에서, “마치 영혼이 육체에 있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에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무엇이든 다 하듯이 성령도 전체 교회를 위하여 일하십니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성령의 작용으로 드러난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이시다. 그는 성전 봉헌식 강론에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건축의 재료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듯이 교회도 사랑으로 묶어주는 힘에 의하여 서로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일치와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는 일치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여도 이승에서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로 인해 언제나 불완전하고 긴장감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와 언제나 일치하지는 못하는 안타까움과 그분께만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많다. 사목자였던 아우구스띠노는 교회 내부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교회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소수의 작은 단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교회는 결코 그런 단체가 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 안에 품고 있으므로 의인들과 죄인들, 구원받을 자들과 잃어버릴 자들이 함께 모여 있다. 그는 교회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처럼 생각하였다. 그물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잡다한 고기들이 있어 좋은 고기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고기도 있다(참조. 마태 13,47-48). 그러나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려내는 작업은 이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하실 것이다. 그는 양떼들에게 가라지의 비유(참조. 마태 13,24-30)를 설명하면서 심판의 날에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우리의 목자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는 산상성훈에 따라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더욱 정진해야 하며 언제나 주님의 기도의 청원문 중의 하나인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를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받아들여진 후 하늘나라에서 영복(永福)을 누릴 때까지 그 기간은 유혹과 시련, 흔들림과 죄의 연속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항구한 기도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세례의 샘과 하늘나라 사이에는 기도의 중간 시간(medium tempus orationis)이 놓여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만 완전한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며 비록 우리의 신앙이 약하긴 하나 복된 바라봄(visio)과 불멸(immortalitas)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주님 안에 휴식을 취할(requies in Domino)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질서 있게 조절하여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도는 이승의 삶에만 속한다. 그 날에는 영원한 안식과 찬미만 있을 뿐이다. “이렛날만은 저녁도 없고 해넘이가 없나이다. 따로이 축복하시어 무궁토록 길게 하셨음이니이다.” 현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의 결과는 교회의 열망에서 나온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그 열망이 채워질 것이다. 교회도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성이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듯이 현세에서는 비록 어려움을 당하지만 본고향에서는 오로지 찬미만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은 여러 가지 약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있으므로 교회의 기도는 그리스도 자신의 지속적인 기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며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들의 기도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분을 머리로 하여 그분의 지체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며 그리스도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띠노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바치는 기도 중에서 시편 기도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5) 신비체 전체의 기도인 시편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고 있고 그리스도는 성경 주석에 있어서 핵심 인물이시다. 아우구스띠노는 “구약에는 신약이 감추어 있고 신약에는 구약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는 계시의 정점인 그리스도(헤브 1,1)에 관한 기사는 이미 고약성경 안에 감추어진 형태로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 주석가의 임무는 구약성경 안에 숨어있는 그 내용을 밝히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감추어진 형태로 본 그리스도 자신의 기도이다. 시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홀로 교회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 고통받는 종의 기도, 그분의 몸인 교회의 기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교회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모습 안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고통을 보며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에서는 희망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하며 기도 생활에 진보하는 이는 시편에 내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염원과 일치해야 한다.

시편을 낭송할 때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은 가끔 앙심과 저주를 표현한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사랑의 계명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시편이 그리스도의 참 기도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편에 나오는 저주와 증오심은 실제로 저주와 증오심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은유적으로(allegorice) 성경을 주석하면서 저주를 예언이라고 주장하였다.


거룩한 시편에서 가끔 원수를 저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원수를 저주하지 않는 의인이며 실은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앞날을 예언하고 있다. 예언은 전하는 자의 선포이지 청원자의 원의는 아니다. 예언자는 악이 누구에게 일어나리라는 것과 선이 누구에게서 나오리라는 것을 영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미래의 일을 보듯이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띠노도 시편 137장 마지막 부분의 저주를 주석할 때는 다소 어려움을 느낀 듯 하다.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친다”는 표현에서 그는 어린것들을 젖먹이들이 아니라 싹에서부터 짓밟혀야 하는 악한 욕망들로 보았다.

이런 식의 성경 주석은 오늘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가 시편을 기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 것은 큰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시편에 나오는 증오심과 저주는 우리 안에서 제거되지 못하고 도사리고 있는 악의 욕망을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므로 기도할 때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잇는 좋은 기회도 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사실 아우구스띠노도 청년기에, “정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자기가 청한 것을 실제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청년기의 그 거만한 기도가 진실한 기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기도할 때의 자세는 진실한 마음이다. 제 아무리 세상의 온갖 좋은 아름다운 말로 기도한다 해도 마음이 하느님께 있지 않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우리 자신을 잘 알게 해주는 동시에 기도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일치되어 그분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한다.


  (6)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

기도할 때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도록 도움을 주는 내적인 힘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 도우심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성화시키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사도 성 바울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로마 8, 26)라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기도한다 해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모를 때가 있다.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희미한 생각마저 나지 않으므로 원의나 열망을 일으킬 수도 없음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은 우리의 열망이 식지 않게 하며 그것을 꾸준히 염원하도록 도와주신다.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을 빌리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청원과 염원으로 간청하게 하고 우리를 고무시켜 주신다.” 우리를 고무시키신다는 표현은 우리의 협력 없이도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성령의 작용을 분명히 도움이라고 하며 사도 성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 26). 이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그 선물은 인간의 어떤 선행적(先行的)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 오직 하느님께서 거저(gratis) 주시는 은총이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성령은 우리가 받기를 갈망하는 분이며 우리로 하여금 청하도록 하시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찾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그분도 우리로 하여금 두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의 열망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열망과 합치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을 보다 진실히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은 점진적으로 성삼의 삶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성삼의 완전한 일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간의 완전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삼의 이러한 유대 관계 안에 참여할 때 성삼의 내주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마지막 목적이며 이 경지에 이른 그리스도인은 이승에서도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7) 기도는 끊임없는 찬미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기도는 세례와 마지막 심판 사이에 있는 갈등과 유혹의 중간 시간(medium tempus)이다. 기도가 끊임없는 찬미로 이어질 곳은 본고향, 즉 영원한 안식일에서만 가능해 진다. 이런 사상은 그가 한 어느 부활절 강론에 잘 묘사되어 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봅니다. 우리는 입술과 생활, 마음과 목소리, 또한 여러 활동으로 주님을 찬미합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동안 우리 안에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따라서 우리의 입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행위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이 얼마나 기쁘게 알렐루야를 노래하겠습니까?”

그는 하늘 나라의 찬미와 연관시켜 사도 성 요한의 말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이러한 변형(變形 transformatio)은 비록 필설(筆舌)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의인들 안에서 분명히 일어난다. 사도 성 요한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 지상생활의 한계점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인들의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천상에서 누릴 의인들의 복된 상태는 인간 사고의 영역을 초월하지만 이승에서도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조금은 맛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축복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할 일은 아멘과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찬미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외침이 아니라 의인들의 마음의 탈혼을 의미한다. 그는 의인들이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에 매혹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곳에서는 죽음이나 그것이 그림자조차 없으며 잠을 자지도 않는 영원한 안식일만 지속될 것이므로 오직 영원한 탈혼적 찬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가르침에 놀라는 양떼들에게 아우구스띠노는 본 고향에서는 지루함이나 피곤함이 없는, 오직 만족할 줄 모르는 만족(insatiabilis satisfactio)만이 인간의 한없는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느님은 “그렇게도 오래고 그렇게도 새로운” 분이시므로 그분을 누림(frui Deo)은 결코 중단되거나 약해지는 법이 없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그 복된 상태가 바로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며 영원한 휴식이므로 더 이상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잠재력은 바로 그 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인간의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기도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노력의 일부이지만 결국에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requiescere in Deo)으로 끝날 것이며 그 행복은 활동이 없는 휴식이 아니라 완전한 휴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멸의 선(善)안에서 휴식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이 바로 불명의 선(善)이시기 때문이다.”

            

 6) 맺 음 말

이제까지 우리는 성 아우구스띠노가 사목적인 측면에서 가르친 기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끝난다. 제 2장에서 우리는 기도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을 보았고 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상적인 기도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았다. 그리스도는 스승인 동시에 참된 의사이시다. 그분은 죄로 인해 찢어지고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치유해 주시는 자비하고 겸손한 의사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주시지 않거나 연기하신다. 그분의 가르침과 치유는 더 큰 선물, 즉 우리가 그분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행위로서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안겨준다. 영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호흡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기도는 바로 인간 실존의 핵심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고백록에서 이 사실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하느님에 대한 염원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힘만으로는 만족스러운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지만 죄와 마음의 혼란으로 인해 그것을 얻지 못하고 만다. 따라서 행복에 대한 욕구와 열망들이 오직 하느님을 향하여 새롭게 방향을 잡을 때 비로소 인간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기능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향하는 것이며 비록 죄와 유혹으로 인해 마음이 혼란해진다 해도 하느님을 향하는 근본적인 욕구를 간직하면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 내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참된 의사이시며 이를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주시고(참조.요한 14,27) 당신과 함께 신적인 삶을 누리도록 배려하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누리는 평화는 인간의 충만한 통합(plena integratio)으로서 이는 삶의 모든 불협화음을 없애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충만히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인 한 내부의 갈등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여 언제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참 평화와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리스도 안에 두면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분은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여러분이 아무 것도 내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시오.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요한 16,24). 이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청원기도로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바탕이 된다. 아우구스띠노는 인간의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삼위일체론에서 이렇게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우리가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모상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는 어떤 기쁨보다도 더 큰 것으로서 바로 우리의 기쁨의 충만함이 된다.” 그 기쁨은 본고향에서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이다. 그 때는 더 이상 “주님, 저는 당신을 알고자하나이다. 저를 알고자 하나이다(Noverim Te, Domine, noverim me)라고 기도하지도 않을 것이며 거울을 통해서 어렴풋이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1고린 13,12) 볼 것이다. 그 때는 신앙 안에 감추어진 모든 신비가 밝히 드러날 것이며 이승에서 신앙을 통해 겪은 온갖 눈물과 고통은 말끔히 사라져 무한한 환희로 변화될 것이다(묵시 21,4-7). 왜냐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바로 지복(至福)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수많은 작품 중의 한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이 외에도 성인과 비슷한 시기에 생활한 이들 중에서 위대한 영성가이자 사목자로서 교회의 삶을 풍부하게 발전시킨 분들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444), 대 레오 교황(+461), 현대의 터키 남부에 있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428), 시라아의 치루스의 테오도로(+460) 등이다. 교황 레오 1세는 업적이 너무나 뛰어나 대(大) 레오로 불린다. 그는 훌륭한 사목자로서 교회의 영성을 풍부히 하였다. 그 외 성인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성경에 관한 방대한 주석에 몰두했으며 사목적으로 신도들을 잘 지도하여 교회의 삶을 풍부히 하였다. 그들의 독창적 활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사목적이었고 표현에 있어서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된 수사학적이었으며 교리적이고 문학적인 메시지를 통하여 후대인들에게 풍부한 유산을 남겨놓았다. 그들은 교리를 설명할 때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도적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의 지적 유산을 적절히 조화시켜 나간 점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