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관찰자

연정.또하나의 성숙?

오래된미래관찰자 2005. 9. 6. 13:50

 

노무현정권이 연정을 제안했다.

분위기는 토론 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이다.

세상에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있겠는가?

다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근시적이냐 미래를 보느냐 아니겠는가?

 

경제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정희정권을 그리워 하는 사람 있다.

모 ,, 그럴 수 있지..

 

경제가 먼저냐? 정치가 먼저냐?

사람이 먹는 것이 먼저냐? 사람답게 사는 것이 목적이냐?

 

노무현정권은 정치에 철학적인 것과 종교적인 신념이 있다.

대중에게 이것이 어필이 될 것이냐?

 

나는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는 자신인 동시에 타인이라고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는 당신(나)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정치상황은 누가 만들고 누가 보고 있는가?

이 정치 상황을 보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정치 상황을 보고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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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춘컬럼] 아, 나는 내리고 싶다. 마주보고 달리는 증오의 고속철에서

이성적 토론 숙성된 그 이후 거부해도 늦지 않아
입력 :2005-09-06 08:55   유시춘 작가
몇 년전에 베트남의 오지인 빈딘성의 한 남루한 마을길을 걷다가 나는 처음으로 그만 독재자 박정희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후 2003년에 가축과 사람이 함께 뒹구는 마굿간같은 몽골의 게르 안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것이 아마도 오랜 분노와 증오에 지쳐 있었던 피로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이엄마가 되는 긴 세월동안 헌법을 뜯어고치거나 아예 정지시켜버리면서까지 박정희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꿈을 믿어주고픈 마음이 느닷없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왜 그랬을까.

세계 최강국 미국과 프랑스, 일본제국과 대적하여 마침내 자력으로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거머쥔 베트남 인민들의 자부심에 한없는 존경을 보내는 마음과 달리 그들의 찌든 가난이 너무도 눈물겨웠기 때문이다.

긴급조치와 5공시절에 청춘을 보낸 나와 같은 이들에게, 적어도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라면 박정희는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당시의 청춘을 키운 건 8할이 독재를 향한 분노와 증오의 힘이었다.

그러나 내심에서 일어났던 이 변화를 나는 아직 친한 벗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당근에 길들여지고 천민자본주의에 세뇌된 천박한 소시민 근성에 젖어든 것이라는 비판 앞에 자신을 방어할만큼 나는 빼어난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거나 인생 전체가 결딴나버린 무수한 이들의 생활을 내가 소상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그만 박정희의 야비한 독재를 용서하고 그의 경제성장 치적을 평가해주자는 말을 결코 발설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보리고개의 비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50대 후반이후의 사람들은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씁쓸할지언정 단한마디로 그들을 무지렁이 민중이라고 간단히 타매할 수 있을까?

평범한 인간들 누구에게나 ‘밥은 하늘이다’

아무리 과장 미화되었다하더라도 박정희시대에 한국이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성취한 것은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다. 90%의 공적이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한 국민들의 몫이지만 개발독재의 사령탑이었던 박정희의 병적인 집요함이 주마가편을 보탠 것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박정희의 죄업은 일제황군의 이력이나 사법살인과 공포정치를 휘두른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물질적 이익으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함은 제3세계 빈국의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으로 있는 통치방식이다.

박정희는 그것이 이후에 한국정치와 국민에게 어떤 독버섯이 될 지도 고민해보지 않은 채 자신의 독재연장을 위해 간단히 지역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공고히 했다.

산업화가 영남의 동남 해안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장을 선두로 진행되면서 그 혜택 또한 영남에 집중되었다. 거기다가 고려 신왕조의 주류들인 신라계가 조작했다는 근거가 있는 문제의 ‘훈요십조’까지 위력을 발휘하면서 영호남은 ‘영원히 화동할수 없는 원구’를 더욱 깊고 넓게 벌려갔다.

TK태생으로 성장기 18년보다 갑절 더 오래 서울에서 살아온 내가 보기에 영남의 호남홀대와 천시는 집단적 정신이상이다. 아무런 근거없는 이 집단가학심리는 곧바로 상대에게 그 밀도만큼의 증오를 불러온다.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킨 것은 87년 양김씨의 분열이었다. 6월의 뜨거운 광장에서 부산, 광주, 대구, 전주, 마산이 함께 ‘독재타도’의 함성을 울리던 이들이 그 해 12월에 지역으로 분열되어버린 일을 생각하면 정말 천추의 한이 맺힌다.

그 사이에 ‘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의 간판이 바뀌었지만 그들은 모두 영남패권이라는 뿌리에서 돋아오른 다른 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주당’ ‘신민당’ ‘평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으로 개명한 야당세력 역시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한 지역붕당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부분 물갈이 있었지만 그 맥은 그대로

나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김문수, 이재오등의 그 불굴의 기개와 헌신을 존경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즈음 노무현 대통령을 증오하는 그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에 전율할 때가 많다. 나는 심재철을 미워하고 박계동을 저주하는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이 너무 괴롭다. 한 몸에 거주하는 ‘지킬’과 ‘하이드’를 목격하면서 인간성에 대한 절망으로 고통스럽다.

뛰어난 언변과 순발력에다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은 능력을 뿜어내고 있는 전여옥에게서 더할 수 없는 천박함과 살기를 느낀다. 그들은 이념과 정책과 노선을 두고 벌이는 토론과 논쟁이 아니라 조건반사적 자판기식 저주와 욕설을 쏟아내고 있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그러니 대통령의 고달픈 순방외교를 향해 돌아오지 말라고 천연덕스럽게 내뱉고, 공중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터무니없는 이유로 평통부의장이자 학교 선배인 공직자에게 서슴없이 술을 면상에 끼얹는다. ‘역사바로세우기’는 야당죽이기로 밖에 보지 않는다.

분단독재의 흉물이자 민주주의의 수치인 국가보안법폐지법안도 간단히 점거농성으로 차단해버린다. ‘정치’는 증발해버리고 천박하고 야비한 언설과 협량한 정략들만 난무할 뿐이다.

지지자들 역시 이 난장판의 복사본이 되어버린다. 인터넷 댓글문화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증오와 적대의 정서는 더욱 증폭해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익명성의 역기능이 끝간데 없이 치닫는다. 세기의 페스트가 창궐하듯이 이 저주와 증오는 집단을 감염시킨다.

지역감정으로 평생동안 음해당하고 다섯번 씩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이는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그가 평생동안 견지한 평화주의 철학은 경이롭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평생의 한이었던 지역주의를 청산하고자 ‘동진’ 정책을 시도했으나 5, 6공시대의 낡고 부패한 영남인물을 기용함으로써 영남에서조차 조소만 당하고 실패했다. 제도로서 구사하기에는 그의 한계와 시대의 한계로 인해 결코 이룰 수가 없었다.

재벌과 구시대의 주류세력에게도 신세진 바 없이 신산고초끝에 참여정부가 홀로서기에 성공했건만 87년 이후에 정착된 지역붕당체제는 여전히 강고하기만 하다.

다소 신선한 변화가 있다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선으로 자립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이 출현한 점이다. 한국정치의 업그레이드 현상으로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민노당은 민족문제나 지역붕당이라는 후진적 현상보다는 부의 집중과 양극화현상을 해결해야할 우선적 아젠다로 설정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제안이 사면초가에 둘러싸여 있는 듯이 보인다. 야당은 물론 그의 우군이라할 진보적 지식인들까지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다.

천신만고끝에 쥐어준 권력을 누구 맘대로 함부로 나누어 주느냐는 비판도 일리가 있고 ‘연정’보다 화급한 것은 내부적으로는 양극화의 해결과 외교적으로는 민족상생을 위한 보다 지혜로운 계락의 모색이라는 비판도 맞는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생동안 참혹한 절대빈곤이라는 ‘트라우마’에 지배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주의라는 덫을 걷어내기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제도의 개혁을 통해 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의 정치지형으로는 우리 정치문화를 정상화시키기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람은 밥을 먹고 생존하지만 그보다 더욱 더 마음에 지배당한다. 지역붕당에 기반한 비정상적 정치문화로서는 생산성을 더 이상 제고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로 하여금 홀로 횃불을 들게 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생업을 내팽개치면서까지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미래에다 올인하고 있다. 물질적 이익을 미끼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하기보다는 미래의 정상화된 정치·사회·문화를 추구한다. 목전의 이익보다는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는 듯이 보인다.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묵정밭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 품종을 재배하려는 농부와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의 ‘벤처 비즈니스’는 권력의 조기이양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있다.

비판자들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항상 자신과 타인의 변증법적 통일체로 존재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인이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깊게 또는 얕게 닻을 내리고 산다.’ 증오와 적개심과 저주가 오고가는 정치문화는 정치와 관계맺고 있는 구성원의 심성을 피폐하게 한다.

몇 년전에 정신과 의사가 십여년에 걸쳐 만여명의 임상실험과 조사에 의한 통계결과를 바탕으로 쓴 한 베스트셀러에 의하면 암의 발병원인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분노와 증오와 스트레스에 기인한다고 한다.

맞다. 팔구십년대에 사망한 운동권 인사들은 애석하게도 대부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의로운 분노와 적개심일지라도 그것이 지속되다보면 인간의 몸과 영혼을 좀먹히고 병들게 된다.

‘5공화국’ 드라마에서 전두환,노태우가 발가벗겨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확연해진 이쯤에서, 민주주의가 왕성히 발전하고 있으며 세계 어느곳보다 표현의 자유가 강물처럼 범람하는 이쯤에서 아, 나는 소망한다.

오랜 적의와 증오를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다.

나는 자신인 동시에 타인이다.

지역패권에 의지해 정치문화를 타락시키고 오염시키는 한나라당의 얼굴에도 내가 있다.

노무현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수구세력의 체취에도 나 자신이 묻어있다.

여기는 우리의 공동체이므로.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증오의 고속철에서 나는 그만 내리고 싶다.

노무현의 연정제안은 정감적으로는 이런 소망에 기초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부디 증오하고 배척하기 전에 우선 진지하게 검토하고 토론해 주기 바란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충분한 토론이 숙성된 그 이후에 거부해도 결코 늦지 않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준비까지 한다면 그 진정성을 한번쯤 진실하게 믿어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